인천교통공사가 인천 중구 월미도에서 운영하는 월미바다열차. photo 뉴시스
인천교통공사가 인천 중구 월미도에서 운영하는 월미바다열차. photo 뉴시스

달 꼬리를 닮았다는 월미도. 제물포 앞바다의 작은 섬이 겪어온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었다. 외세의 침탈과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곳이 이제는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꿈꾸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월미도는 숙명적으로 비극의 땅이었다. 개화기부터 한국전쟁까지 서울로 향하는 관문이었던 이 섬은 늘 외세의 표적이 됐다.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이, 신미양요 때는 미국군이 점령했다. 러일전쟁의 첫 포성이 울린 제물포해전이 바로 월미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다. 일제는 월미도를 군사기지로 삼았고, 1920년대부터는 ‘조선 제일의 유원지’라며 월미조탕을 비롯한 호화시설을 지어 일본인들만의 낙원을 만들었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월미도는 그림의 떡이었다.

한국전쟁 때 월미도의 운명은 더욱 참혹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평범했던 마을이 졸지에 잿더미가 됐다. 주민들은 무고하게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이들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직도 월미산 숲의 나무들에는 포탄 파편이 박힌 흔적을 볼 수 있다고도 전해진다.

그런 월미도가 시민들에게 돌아온 건 1980년대부터였다. 해안가에 놀이동산들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 월미도 바이킹은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90도 가까운 각도까지 올라가는 아찔한 스릴, 허술해 보이는 안전바가 오히려 공포감을 배가시켰다. “월미도 바이킹 타봤어?”는 수도권 젊은이들 사이에서 용기를 시험하는 통과의례가 됐다. DJ가 직접 기구를 조종하며 유쾌한 입담으로 탑승객과 구경꾼 모두를 웃게 만들던 ‘디스코팡팡’도 월미도의 명물이었다. 

주말이면 인천역에서 내린 인파가 월미도로 몰려들었고, 조개구이 연기와 갈매기 울음소리, 젊은이들의 비명소리가 뒤섞인 활기찬 풍경이 펼쳐졌다.

한편 놀이동산의 번성 속에 월미도의 역사는 잊혀 갔다. 디스코팡팡을 타며 깔깔대는 젊은이들 중 이곳이 네이팜탄에 불타던 땅이었음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바이킹이 흔들리는 그 자리가 한때 일본 신사가 있던 곳이라는 사실도, 수많은 이민자들이 고국을 떠나던 마지막 땅이었다는 기억도 희미해져 갔다.

그런 월미도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건 2001년 월미공원의 개방이었다. 50년간 군부대가 주둔했던 월미산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뒤이어 2003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이민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1902년 겨울 제물포항에서 하와이로 떠난 102명의 조선인을 시작으로 한국 이민 역사를 재조명한 전시는 잊혔던 과거를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에는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이 개관하며 월미도는 개항부터 한국전쟁, 산업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인천 바다의 기록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역사 교육의 현장이 됐다.

월미도 놀이동산들은 여전히 성업 중이다. 바이킹은 예전만큼 높이 올라가지 않지만 여전히 비명소리를 자아내고 디스코팡팡 DJ들의 입담도 건재하다. 

다만 이제는 박물관을 둘러본 가족들이 역사 이야기를 나누고, 월미공원 산책로를 걸으며 70여년 전 상처를 간직한 숲을 돌아보는 모습도 흔해졌다. 월미도는 더 이상 잊힌 역사의 땅도, 단순한 유흥의 공간도 아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 섬과 만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월미도의 오늘은 그래서 더욱 다채롭다. 

 

주소: 인천 중구 북성동1가 97-32 (월미도 공영주차장)

대중교통: 지하철 1호선 인천역 하차 후 버스 이용

김지나 서울대학교 연구교수·도시문화칼럼니스트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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