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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흰머리. 눈에 띌 때마다 신경 쓰이는 이 흰머리가 사실은 단순한 노화 현상이 아니라, 암세포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흔적일 수 있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일본 도쿄대학교 의학과학연구소 에미 니시무라(Emi Nishimura) 교수 연구팀이 그 주인공이다. 연구팀은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현상이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melanoma)을 막기 위해 스스로 기능을 멈춘 결과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치 퓨즈처럼 전류가 너무 많이 흐르면 스스로 녹아서 회로를 끊어 불이 나는 것을 막는 것과 같은 셈이다.

 

손상된 세포 소멸하며 암 발전 가능성 낮춰

노화의 가장 뚜렷한 징후 중 하나는 흰머리다. 흰머리는 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는 원인은 멜라닌 색소를 만들어내는 ‘멜라닌세포 줄기세포(McSC)’에 있다. 이 세포는 모낭 속에서 주기적으로 재생하면서 멜라닌 색소를 만들어 머리카락과 피부색을 결정한다. McSC의 유일한 기능이 멜라닌 색소를 생성하는 것이다. 멜라닌은 검은빛이 나는 색소로, 그 양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나타낸다. 멜라닌 색소가 많으면 검은색 머리카락이 되고, 적으면 금발이나 갈색 머리가 된다. 노화가 진행되면 머리카락이 하얘지는 이유는 McSC 수가 줄고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멜라린 색소 대신 공기가 모간(毛幹·hair shaft)을 채우기 때문에 흰색, 회색, 또는 은색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백인은 30대 중반, 동양인은 30대 후반, 흑인은 40대 중반에 흰머리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10~20대부터 흰머리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 시기와 속도는 천차만별이다. 흰머리가 단순한 노화가 아니라 유전이나 스트레스 등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흰머리 발생에서 유전적 요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30%이고 나머지 70%는 나이, 스트레스 등의 외부 요인이 작용한다. 백발처럼 흰머리가 많이 난다면 유전자가 원인일 수 있다.

McSC는 자외선, 노화, 스트레스, 화학물질 등으로 쉽게 손상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활성산소’가 발생해 모낭 속 세포의 색소 기능을 떨어뜨린다. 또 스트레스 호르몬인 ‘아드레날린’이 많이 분비돼 모근 주변의 혈관을 수축시키기 때문에 영양공급이 잘 안되고, 멜라닌 색소가 적게 만들어져 흰머리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의 세포는 평생 DNA의 손상을 유발할 수 있는 내외부적 스트레스 환경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다. 세포의 DNA 손상은 노화와 암 발생에 핵심 요인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DNA 손상의 구체적 원인과 DNA 손상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명확히 규명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일본의 니시무라 교수 연구팀이 흰머리 발생이 암세포에 대한 ‘방어 반응’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네이처 셀 바이올로지’에 발표했다. McSC에 주목해 실시한 실험을 통해 흰머리와 악성 흑생종 간의 연관성을 밝힌 연구 내용이다. 물론 연구팀이 처음부터 McSC에 관심을 가진 건 아니다. 처음 연구는 DNA가 손상되면 어떤 줄기세포는 죽거나 사라지고, 또 어떤 줄기세포는 살아남아 암세포로 변하는데,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밝히자는 목적에서 시작됐다. 그러다가 ‘만일 McSC가 손상된다면 머리카락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라는 의문을 품게 됐다.

이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 연구팀은 생쥐를 대상으로 동물실험을 했다. 먼저 생쥐를 자외선B(UVB)와 같은 발암 물질에 노출시키고, 이와 유사한 화학물질을 흡입하게 해 McSC의 DNA에 손상을 유도했다. 이후 McSC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했다. 그 결과 DNA 손상 스트레스가 모낭 내 McSC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점을 확인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DNA 손상이 발생했을 때, 일부 줄기세포는 자신이 손상된 ‘암 위험 세포’임을 스스로 인식하여 정상적인 자가 재생 기능을 멈추고 소멸했다. 이로 인해 모발의 색소가 없어져 생쥐의 머리털이 하얗게 변했다. 손상된 McSC가 죽어가면서 더는 멜라닌 색소를 만들지 않아 색을 잃는 것이다.

하지만 발암 물질에 노출된 일부 줄기세포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재생 기능을 유지하며 세포 집단을 더 확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비정상적인 분열을 일으켰고, 이 유전적 손상이 계속 축적돼 흑색종인 암세포와 유사한 형태로 변했다. DNA가 손상된 상황에서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는 대신 암 발생 위험이 높은 상태로 전환된다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즉 DNA가 손상된 세포가 제대로 제거되지 않으면 암으로 발전할 위험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흰머리와 흑색종은 무관하지 않아

이처럼 세포의 DNA가 손상되면, 기능 정지와 분화 중 한 가지로 유도된다. 연구팀은 머리가 하얗게 되는 현상은 손상된 세포를 제거해 잠재적 암 위험성을 줄이는 일종의 ‘자연적인 보호 메커니즘’일 수 있다고 해석했다. 암을 막기 위한 생물학적 방어 반응의 흔적이 흰머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흰머리가 암을 예방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손상된 줄기세포가 제대로 제거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니시무라 교수는 “흰머리와 흑색종은 같은 줄기세포라도 스트레스 반응과 주변 환경에 따라 소멸되거나 증식되는, 상반된 두 운명으로 갈라진다”고 덧붙이면서 “이번 연구는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현상과 흑색종이 서로 무관한 게 아니라, 줄기세포의 스트레스 반응이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결과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람의 두피 모낭에서는 머리카락이 성장기, 퇴행기, 휴지기를 거친다. 이 3단계 과정을 거치며 모발이 자라고 빠지는 순환을 반복한다. 성장기는 2~8년, 퇴행기는 2~3주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모낭에서 평생 동안 생기는 머리카락의 수는 25~35개로 정해져 있다. 이 개수를 넘어서면 더 이상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는다. 새치가 보기 싫더라도 뽑지 말고 그대로 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단 흰머리가 생기면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흰머리가 발생한 주 요인이 영양 결핍과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면, 결핍된 영양소를 섭취해주고 건강한 전신 상태를 회복한다면 다시 검게 돌아갈 수 있다. 연구팀의 연구에서 알 수 있듯, 흰머리는 의미 없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DNA 손상을 입은 세포가 선택적으로 사라져가는 현상이다. 따라서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검증되지 않은 탈색 억제 수술이나 외용제 사용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는 게 연구팀의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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