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2월 7일 서울 서초구 한국컨퍼런스센터 컨퍼런스A룸에서 열린 ‘청년 곁에 국민의힘! 국민의힘 단국캠퍼스 개강총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2월 7일 서울 서초구 한국컨퍼런스센터 컨퍼런스A룸에서 열린 ‘청년 곁에 국민의힘! 국민의힘 단국캠퍼스 개강총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얼마 전 디즈니의 명작 만화 ‘인어공주’의 영화 실사판 제작 발표가 있었다. 오랜 시간 두루 사랑받던 작품인지라 전 세계의 ‘인어공주’ 팬들은 그 실사판의 주인공이 어떤 인물일지 기대했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이 낙점되자 큰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만화 원작에서는 백인으로 묘사되었던 주인공이 영화 실사판에서는 흑인으로 바뀐 것이다. 참신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원작을 잘 ‘구현’해 주길 바랐던 많은 팬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는 할리우드 영화의 ‘흑인 주인공’ 논쟁으로 재점화되기 시작했다.

최근 할리우드에서 생산되는 영화에서는 흑인 배역이 꼭 등장한다. 인종차별과 인종갈등이 심각한 미국에서 등장인물의 인종 구성은 대단히 예민한 문제고, 영화제작사는 인종차별 논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영화의 등장인물 가운데서 한 명 이상의 정형화된 흑인 캐릭터를 넣기 시작했다. 이른바 ‘토큰 블랙(Token Black)’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 ‘토큰 블랙’은 인종차별 논란에 대한 영화제작사의 면피용일 뿐, 실질적으로 미국 내의 인종차별 해소나 흑인인권 향상을 위한 노력의 일환은 아니었다. 흑인이 등장인물에 포함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단역이나 비중이 낮은 조연으로 배치되었다. 설령 비중이 있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하더라도, 백인 주인공의 미덕을 강조하는 보조적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최근에는 고정관념을 깨고 ‘인어공주’의 사례처럼 흑인을 주인공으로 전면 등장시키거나, 극중에서 백인 주인공이 죽은 뒤에도 흑인 조연이 끝까지 살아남는 스토리도 더러 있지만, 여전히 미국 영화계의 주류는 누가 뭐래도 백인이다.

 

‘청년 배려’ 착각을 심어주는 장치

여기서 주목할 점은 ‘토큰 블랙’의 압박이 미국 영화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도, 미국 내 절대다수 흑인들의 처우는 한 치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영화의 등장인물에 흑인이 포함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장 흑인에게 불리한 제도가 개선되거나 흑인이 처한 사회·경제적 위치를 좋게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토큰 블랙’은 영화를 통해 ‘인종차별은 없어지고 있고 흑인 인권은 향상되고 있다’는 착각을 만들어, 냉정한 현실을 외면하게 하면서 치열한 정치적 투쟁에도 김을 빼버린다. 최근 이루어진 여러 연구결과에서 실제로 미국 내 절대다수의 흑인들은 여전히 사회·경제적으로 낙후된 삶을 살아가면서, 노동시장과 자산시장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토큰 블랙’이 있든 없든 미국의 주류는 여전히 백인이라는 의미다.

얼마 전 치러진 6·1 전국동시지방선거의 공천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보여준 청년 할당제에서 ‘토큰 블랙’이 어른거린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방선거 후보자 중 일정비율 이상을 의무적으로 청년에게 배정했다. 청년 공천의 비율을 엄격하게 관철하는 과정에서 잡음도 크게 일었다. 역차별의 문제가 대두됐으며, 이에 불복한 민주당 후보자들은 민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와중에도 더불어민주당은 청년에 대한 강제 공천 할당을 고수했다.

그러나 동시에 민주당은 중진 박완주 의원의 성범죄 의혹에 휩싸였으며, 이른바 ‘검수완박’ 법안을 무리하게 통과시키면서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민주당의 구태가 고스란히 재발되었다는 것이다. 청년을 앞세웠지만 실질적인 당의 쇄신은 전무했다. 결국 민주당은 6·1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했다. 청년들을 의무적으로 공천했지만 결코 민주당 내에서 청년들은 주류가 되지 못했고 청년들의 삶도 개선되지 않는, 정치권의 ‘토큰 블랙’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정치권에서 청년들이 과소대표되는 현상은 만성적으로 지적받아온 문제다. 그 때문에 그간 정치권에서는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선거 때가 되면 청년 공천에 열을 올렸다. 특히 청년에 대한 의무공천은 ‘당이 젊어진다’는 착각을 심어주는 장치로 활용돼 왔다. 불과 2년 전에는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이 ‘퓨처메이커’라는 이름으로 청년 후보자를 냈다. 극우 유튜브에 휘둘리며 탄핵을 부정하던 보수정당이 젊은 후보자 몇 명을 내세운다고 해서 국민들이 그것을 ‘개혁’이나 ‘쇄신’ 또는 ‘젊은 정당’으로 봐줄 리 만무했다.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의 모습 그대로, 2020년 총선에서 미래통합당도 역대급 참패를 당했다. 청년 할당이 있든 없든 정치권의 주류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기성세대라는 의미다.

청년들에 대한 공천 할당제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매우 신중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청년들이 일부 공천된다고 해서, 그것이 정치권 내 청년들의 지위가 향상되거나 대한민국 청년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권이 ‘청년을 배려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는 가장 좋은 장치로 활용하는 것이 청년 공천 할당이다. 청년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청년 공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무게감 있는 정치인들의 처절한 투쟁에서 출발한다. 청년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정치적 사안들은 연금개혁이나 노동개혁과 같은 해묵은 난제들이다. 신인이나 청년보다 되레 중진들이나 당지도부가 팔을 걷고 힘을 모아야 겨우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청년에 대한 의무 할당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또한 청년 할당제는 청년을 대변하지 못하는 청년들이 청년 대표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역설을 내포한다. 정치권에서 이뤄지는 청년 할당제의 혜택을 받는 청년들은 청년 중 극히 일부다. 청년 공천은 크게 두 가지 형태를 보이는데, ‘스타 영입’ 형식이거나 오랜 시간 정당에서 활동한 청년들에게 ‘보상’하는 형식이다. 이 두 가지의 경우 모두가 대다수의 청년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스타 영입’ 형태의 청년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은 청년들에게 적용되는 제도고, ‘보상’ 형태의 청년 공천은 정치활동에 충분히 투자할 시간이 있는 청년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된 제도다. 우리 사회의 대다수 청년들이 먹고사는 문제로 정치에 관심이 적거나, 직장 문제로 정당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된다. 즉 청년 공천의 수혜자들이 대한민국에 사는 절대다수의 청년을 대표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정당 제도 개혁 없는 할당제는 눈속임

청년들이 마음 놓고 정치를 할 수 있는 정당 제도의 개혁, 청년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키는 정책의 개선이 없는 청년 할당제는 눈속임이다. 민주당의 청년 할당제가 바로 그렇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은 집권 당시 노동문제, 연금문제를 방치하고 청년들의 주거 불안을 가중시켰다. 그런 상황에서 관철한 민주당의 청년 할당제는 그간 열심히 선거를 준비한 후보자들에 대한 역차별이자, 기성 정치인들의 만행을 가리기 위해 소수의 청년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불공정한 제도로 귀결되었다.

청년들을 의무적으로 공천한다고 할지라도 20대 비대위원장이 같은 당 기성정치인에게 노골적으로 무시당하고 지탄받는 더불어민주당은 청년에게 좋은 정당이 아니다. 오히려 공천 할당 없이 30대 당대표가 주도적으로 당을 이끌어가는 국민의힘이 청년에게 좋은 정당이다. 그 때문인지 놀랍게도 청년 공천 의무 할당이 없던 국민의힘이 더불어민주당보다 이번 선거에서 더 많은 광역의원을 배출했다. 청년을 위한 정치, 청년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정치는 할당제에 있지 않다. 

김재섭 국민의힘 전 최고위원·도봉갑 당협위원장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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