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6일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무함마드 빈 살만(MBS) 사우디 왕세자와 회담을 갖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7월 16일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무함마드 빈 살만(MBS) 사우디 왕세자와 회담을 갖고 있다., photo 뉴시스

'백악관의 격렬한 반응'.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 협의체인 'OPEC 플러스(OPEC)+'가 원유 생산량을 2년 만에 최대폭으로 줄이기로 하자 워싱턴포스트는 백악관 관계자들의 반응을 '격렬한'이라는 형용사로 표현했다. OPEC플러스는 10월 5일(현지시간) "11월부터 하루 원유 생산량을 이달보다 200만 배럴 줄이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최대 감산 폭인데 200만 배럴은 전 세계 생산량의 2% 정도다.

백악관이 격렬하게 반응한 건 나름 이유가 있다. 일단 미리 경고를 했다. OPEC플러스가 100만 배럴을 감산할 거라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10월 3일 백악관은 "감산은 완전한 재앙"이라며 "적대적 행위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OPEC 플러스는 오히려 예상치보다 2배 많은 감산으로 미국의 '경고'에 화답했다. 

감산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화를 돋울만한 일이다. 이미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에너지 비용이 또 다시 부담이 된다는 건 끔직하다. 한동안 안정됐던 국제유가가 이번 감산 조치로 다시 출렁이게 된다면 물가상승률이 또 다시 우상향 할 수 있다. 재무부 부차관보를 지낸 마크 소벨은 "이번 감산은 글로벌 금융 위기에 대한 위험을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오펙플러스가 감산을 '11월'부터 시작한다고 못 박은 것도 백악관 입장에서는 불쾌하다. 11월 8일은 미국의 중간선거일이다. 바이든 행정부와 민주당에 '감산'은 치명타로 작용할 수 있다.

최근의 유가 하락은 민주당의 승리 가능성을 끌어올렸다. 바이든 대통령 지지율도 올랐다. 유가가 다시 상승한다는 건, 그동안의 호재가 악재로 바뀐다는 얘기다. 미국에 망명 중인 사우디 반체제 인사 칼리드 알자브리는 "전례 없는 이번 감산은 민주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이며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에 손해를 끼치기 위한 선거 간섭"이라고 주장했다.

지정학적 긴장과도 뗄 수 없다. 오펙플러스의 멤버인 러시아는 유가 하락으로 국가 수입이 줄고 있었는데 이번 감산 조치로 이득을 볼 가능성이 커졌다. 애쉬 카터 전 국방장관은 "사우디는 정녕 러시아의 전쟁 비용을 지불하는 걸 돕고 있다는 비난을 받길 원하는 것인가"라며 비판했다.

MBS 무시했던 바이든, 되돌려주는 MBS

사우디는 중동에서 미국과 협력하는 국가로 분류돼 왔다. 하지만 이번 감산 이후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새롭다. 미국 안에서는 군사적 관계부터 단절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 톰 말리노스키 민주당 하원의원은 "바이든 행정부가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UAE)에서 미군과 미사일방어(MD) 시스템을 철수하는 감축안에 관한 법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힐 정도다.

사우디는 왜 미국의 분노에도 아랑곳 없이 반대로 움직이고 있을까. 사우디의 실권을 쥐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와 미국의 불편했던 히스토리를 되짚어봐야 한다. 바이든 정부 등장 뒤 MBS는 엄청나게 무시를 당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MBS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살해를 지시했다는 점을 들어 그를 반인권적 지도자로 봐왔다. 선거 기간에는 사우디를 ‘천덕꾸러기’라고 부르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심지어 백악관은 MBS를 정당한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는 듯한 뉘앙스도 풍겼다. 지난해 2월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언론 브리핑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와의 관계를 재조정할 의향을 갖고 있다”고 밝혔는데 “대통령의 상대는 살만 국왕”이라고 언급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동급은 살만 국왕이지, 사우디의 실권을 쥐고 있는 MBS가 아니라며 깎아내리는 발언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중동의 축을 사우디에 두면서 MBS를 호의적으로 대했다. 카슈끄지 살해 뒤 미국 여론이 MBS를 비난할 때도 트럼프는 그를 감싸고 두둔했다. 전략적으로도 사우디를 중요하게 다뤘는데, 미군의 해외 주둔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던 트럼프는 이스라엘과 사우디를 화해시킨 뒤 이 두 나라를 이란과 대립시켜 중동의 밸런스를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반면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와 반대로 갔다. 일단 MBS에 냉랭했고 사우디를 중동의 중심에 놓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란과 핵협상을 해 이란 자체의 위험도를 낮추는 방법을 택하려고 했다. MBS 입장에서는 바이든의 무시에 상처입은 상황에서 중동 전략마저 맞지 않으니 미국과의 협력 노선에 의문이 들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모든 상황이 변했다. 물가가 급등하고 글로벌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섰지만 사우디는 유가 급등이라는 호재를 맞았다. 사우디의 위상과 영향력도 올라갔다. 이집트, 요르단 등 사우디와 평소 데면데면하던 나라들은 사우디의 협력이 필요하다. 이 나라들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우디의 투자와 지원을 바라고 있다. 

한때 제기됐던 사우디 위기론과 MBS의 자질론은 인플레이션 시대가 도래한 뒤 사라졌다. 바이든 대통령에게 무시당했던 MBS는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가라는 복병 앞에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7월, 자신이 천덕꾸러기라고 부르던 사우디를 방문했고 "향후 수개월 내 벌어질 일에 대해서 기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그 수개월 뒤 오펙플러스는 '감산'이라는 폭탄을 그에게 던졌다, MBS의 '뒤끝 작렬'이다.

※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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