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국내에서 10년 넘게 ‘주민자치’만을 연구한 곳이 있다. 사단법인 ‘한국주민자치중앙회’다. 중앙회는 지난 2013년 설립돼 130여회의 현장 세미나와 13회의 국회 대토론회 진행, 140여회의 자치행정 실무 전문 월간지 발간 등을 거듭하며 실질적 주민자치 실현 방안 모색에 앞장서왔다. 중앙회는 지난 1월 11일 ‘품위 있는 주민, 품위 있는 마을, 품위 있는 한국’이라는 주제의 국회 대토론회 개최를 시작으로 올해 또한 다양한 활동을 본격화하고 있다. 당시 토론회에는 각 유관 단체와 여야 현역의원들이 대거 참석해 주민자치와 관련한 구체적 협력 방안을 논하기도 했다. 

한국주민자치중앙회를 이끌어온 전상직 회장은 “국내의 주민자치는 사실상 기형화된 형태로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며 “지금의 위험, 불신 사회를 극복하고 개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선 올바른 주민자치 정착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지난 1월 23일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만난 전 회장은 지난 토론회 내용을 비롯해 주민자치의 정의와 국내외 실태·차이, 실질화 방안 등을 하나하나 짚었다.   

 

“주민과 자치는 없고 센터만 남았다” 

전 회장은 ‘주민자치’의 의미부터 언급했다. “한마디로 작은 마을 단위인 ‘읍·면·동·통·리의 민주주의’라고 봐야 한다.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법과 제도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서로 연대하고 소통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거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은 서로의 능력을 공유하고 빌려주며 풍요롭고 윤택한 삶을 살 기회를 얻는다. 일반 동사무소나 주민센터의 행정 능력으로는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전 회장은 “국내에선 이런 주민자치가 잘 실현되지 않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읍·면·동장만 해도 주민들 선거가 아닌 상위 기관장인 시장·군수·구청장이 임명한다. 주민자치인데 주민이 빠져 있는 셈이다. 민주주의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또 국내 정치인과 공무원들은 기본적으로 주민자치로 주민들이 끈끈하게 뭉치는 것을 멀리하다 보니 주민자치가 싹트기 어려운 사회적 분위기도 존재한다. 쉽게 말해 집단 민원 내지 자신들과 다른 성향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멀리하는 등의 행위가 주민자치를 해친다는 말이다.”

전 회장은 지난 1월 11일 국회 대토론회 당시 국내의 이런 현상을 지난해 영국 싱크탱크 레가툼이 내놓은 번영지수를 앞세워 설명하기도 했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적 품질, 건강, 교육지수에서 167개국 중 10위권에 들었지만 사회자본지수에선 107위를 기록했다. 또 공적(국가·정부 등)·사적(타인 등) 신뢰도는 굉장히 낮게 나타났다. “사회자본이란 구체적으로 신뢰, 네트워크, 규범, 제도 등을 일컫는데 주민자치를 통해 확립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해당 지수가 낮게 나타난다는 것은 결국 불신이 팽배하고 위험한 사회가 됐음을 보여준다.” 

전 회장은 “한국의 압축 성장이 이런 역효과를 가져왔다”며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서구가 300년, 일본이 100년 동안 이룬 경제 성장을 한국은 30년 동안 압축해 달성했다. 이 과정에서 도시화와 아파트 문화가 심화됐다. 아파트 거주 가구원 수의 경우 1990년까지만 해도 전체 가구원 수의 14%에 불과했는데 2000년 40%, 2010년 50%를 훌쩍 넘어버렸다. 아파트 구조 특성상 아파트는 주민들에게 ‘쉼터’는 될지라도 이웃 간 ‘삶터’나 ‘놀터’를 제공하진 못한다. 이 때문에 이웃은 타자화됐고 주거는 은신처화됐다. 공공성이나 사회성은 결여될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 개발과 함께 사회·문화 교육도 함께 이뤄져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주민자치가 실패한 이유다.”

전 회장은 또 “과거로 거슬러 오르면 사실 주민자치란 용어가 1999년 김대중 정부 당시 일본에서부터 처음 들여와 쓰였는데, 당시 한국 상황에 맞게 재정립한다는 것이 한국에도, 일본에도 맞지 않는 주민자치가 된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 때문에 지역 곳곳에 세워진 주민자치센터를 두고 “주민과 자치는 없고 센터만 남았다”고 평했다.

 

“스위스, 대만 등의 주민자치 참고해야” 

전 회장은 “역대 정부들과 비교해 현 정부의 주민자치 실현 의지는 굉장히 부족하다”며 다음과 같은 지적도 했다. “지방자치 관련 법률이 이명박 정부에서 만들어져 박근혜 정부에서 처음 시행됐는데, 매 정부마다 주민자치에서 주민이 주체가 된 적은 없다. 박근혜 정부에선 공무원들이 주민자치를 도맡았고 문재인 정부에선 공무원들 대신 시민사회단체들이 주민자치를 주도했다. 그리고 현 정부는 그 시민사회단체를 모두 몰아냈는데, 그 이후로 더 나은 제도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이 대규모 사회운동인 볼리바르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던 데에는 지역사회를 장악해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돌이켜보고 지금이라도 주민자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전 회장은 주민자치 실질화를 위한 참고 사례로 스위스 등을 거론했다. “스위스의 경우 읍·면·동장을 주민들이 직접 뽑는다. 직접 민주주의 구조를 취하는 셈이다. 또 외국인에게 국적을 부여하는 권한 또한 읍·면·동 주민들에게 주고 있다. 가령 한 해 전 인구의 1%가량의 외국인에게 국적을 부여한다고 가정했을 시 그 인원을 지역별로 나누곤 주민투표로 대상을 결정하는 거다. 지역에 사는 주민이 주민으로 적합한 외국인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란 취지에서다. 주민자치는 자연스레 강화될 수밖에 없다. 또 대만은 모든 아파트 건물의 1층을 공유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노인정, 독서실, 놀이방 등으로 활용되는데 이 모두가 주민자치 공간이 된다. 또 영국의 경우 지역 단위로 아파트 교육을 진행한다. 국내에선 볼 수 없는 풍경들이다.”

중앙회에선 이 같은 해외 사례들을 참고하여 전입 주민 환영회, 통·리·아파트 자치회, 주민자치를 주제로 한 총선후보자 토론회 등을 계획 중이다.  

전 회장은 “디지털 시대의 도래로 인간관계가 지속해서 옅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혈연, 학연만 남게 되면 굉장히 폐쇄적이고 위험할 수 있다”며 “주민자치는 특별한 게 아니며 이웃끼리 교류하며 지내는 것으로 이것이 가져다줄 사회적 안정감과 삶의 풍요로움 등은 굉장히 크다”고 말했다. 

전 회장은 주민자치 실질화로 이른바 ‘품위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품위’라는 것을 개념화해서 말하자면 강제되지 않은 여건에서 자기 본분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면서도 남의 본분은 침해하지 않는 태도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건강하게 발전하는 사회를 말한다. 주민자치가 궁극적으로 추구할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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