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가 유일한 차 종주국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차가 커피처럼 음료의 한 종류일 뿐이지만 한동안 유럽 왕실에서는 황금보다 귀하고 비싼 사치품이었다. 왕실과 산업혁명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귀족이 교류하는 사교계에서 차와 중국산 도자기는 ‘필수템’인 동시에 ‘잇템’이었다. 중국 차 수입에 의존했던 영국은 막대한 국부가 유출되어 재정이 고갈될 정도였다. 궁여지책으로 인도에서 아편을 제조해 중국에 파는 삼각무역으로 무역적자를 메우는 형편이었다. 중국이 독점하고 있던 차 산업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영국은 인도에서 차 산업을 시도했다.
영국의 박물학자이며 1778년부터 41년 동안 왕립학회 회장을 역임한 조지프 뱅크스(Joseph Banks)가 인도에서 차를 재배하려고 처음 시도했다. 시험 재배를 해본 영국동인도회사는 중국 차와 비교해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인도에서 차 재배를 중단했다. 차로 인한 무역적자를 만회하고 무역항 개방을 위해 1792년 영국은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를 단장으로 영국 역사상 최초로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조공 외에는 무역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청나라 건륭제(乾隆帝)는 사절단의 요구 조건을 묵살했다. 매카트니 사절단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돌아가고 무역적자는 누적되어 갔다.

브루스 형제의 인도 차 도전기
인도 무굴제국에 파견된 영국의 해군 소령 로버트 브루스(Robert Bruce)는 네덜란드인 린스호튼이 1598년에 기록한 인도 탐방기를 통해 인도인들이 차를 식용과 약용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했다는 내용을 알고 있었다. 정글을 탐방하던 1823년 로버트 브루스는 미얀마와 중국의 국경지대인 사디야(Sadiya)산에서 높이 1.3m, 밑동 둘레 0.93m로 제법 큰 대엽종 차나무를 발견했다. 사디야산 인근 아삼 지역의 토착 차나무 아삼종(Camellia sinensis var assamica)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아삼종이 차나무로 인정받기까지는 15년의 세월이 더 걸렸다.
차를 끓여 마신다는 싱포족(Singhpo ·중국 운남성에서 넘어온 소수민족)의 족장인 비사 가움(Bisa Gaum)을 아삼의 귀족 마니람 드완(Maniram Dewan)의 소개로 만난 로버트 브루스는 묘목과 씨앗을 받기로 했다. 영국동인도회사에서 근무하는 동생 찰스 브루스(Charles Bruce)를 거쳐 콜카타의 보타닉가든(Botanic Gardens)의 식물학자 나다니엘 월릭(Nathaniel Wallich)에게 묘목과 씨앗이 도착했다. 하지만 샘플 분석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로버트 브루스는 사망했다. 나다니엘 월릭은 아삼종 차나무를 씨앗으로 동백기름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키시 동백나무(Camellia kissi)로 오인하고 찰스 브루스에게 결과를 통보했다. 판정에 의문을 품은 찰스는 마니람 드완의 도움으로 아삼 지역 정글에서 중국 차나무와 다른 야생 차나무를 발견해 영국동인도회사에 보고했다.
중국종 외에는 차나무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던 그 당시 영국동인도회사는 경제성이 없어 보이는 이 신종 차나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형의 유업을 이어 찰스 브루스는 싱포족에게 차나무의 종자와 묘목을 받으면서 재배기술도 배워 정원에 심었다. 찰스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삼 지역에 남아 이 나무가 신종 차나무일 것으로 확신하고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브루스 형제를 도운 마니람 드완은 인도에서 처음으로 상업적인 차를 재배한 인도인으로 기록됐다.
1833년 중국 차 무역 독점계약이 끝난 영국동인도회사는 차나무의 유출을 엄금하고 제다기술 유출을 철저하게 가로막는 중국에 맞서기 위해 1834년 2월 1일 인도에 대규모 차농장을 설립하기 위한 차위원회를 설립했다. 차위원회에 합류한 찰스 브루스는 차 재배의 가능성을 연구하기 위해 1836년 아삼을 방문한 위원들에게 형인 로버트가 야생 차나무를 처음 발견한 사디야산을 보여주고 자신이 키운 차나무 농장을 공개했다. 형이 의뢰한 차나무를 오판했던 나다니엘 월릭도 위원으로 동참했다.
나다니엘 월릭을 포함한 식물학자들이 여러 해 동안 분석을 해본 결과 중국종 차나무(Camellia sinensis var. sinensis)와 다른 아삼종 차나무(Camellia sinensis var assamica)로 판명됐다. 마침내 1839년 콜카타의 차위원회에서 중국종과 다른 차나무임을 인정받았다.
중국이 독주하던 차 산업에 불만이 컸던 영국은 식물학계를 주도해 브루스 형제가 발견한 사실을 근거로 차나무 원산지의 기원을 인도로 공인받았다. 차나무 원종으로 인도산 아삼 대엽종이 기록되며 인도가 차 종주국으로 등극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국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중국의 자존심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가 중국 대신 차 원산지로 통용되는 모욕감을 회복할 틈도 없이 중국 차 수입으로 발생한 엄청난 무역적자를 아편 밀수출로 만회하던 영국이 도발한 아편전쟁에 휘말린 중국은 완패했다. 1842년 8월 중국이 영국과 체결한 불평등조약 ‘난징조약’을 계기로 중국은 세계 중심에서 반식민지(半植民地) 봉건국가로 몰락했다. 1857년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완전히 침몰시키고 맺은 톈진조약은 중국의 조계지를 반식민지화시켜 중국을 열강의 먹잇감으로 만들어버렸다.
100년 이상 이어진 중국의 차 굴욕
국력이 바닥을 치면서 문화발언권도 약해진 중국이 제시하는 수많은 고서(古書)에 나오는 오래된 중국 고차수(古茶樹)에 대한 기록들도 실물이 없다는 이유로 반려됐다. 국력이 기울면서 차 종주국이 뒤바뀌는 중국 차 문화의 굴욕은 100년 이상 이어졌다. 그동안 중국 차 수입에 100% 의존했던 영국은 어느덧 최대 차 수출국가로 변모해 전 세계 차 가격 결정권을 갖게 됐다. 차가 중국 역사와 함께 출발했다고 믿는 중국이 치욕을 벗어날 수 있었던 계기는 1939년 귀주(貴州·구미저우)성에서 높이 7.5m의 차나무를 찾아내면서 시작됐다.
운남(雲南·윈난)성과 사천(四川·쓰촨)성에서도 연이어 1000년 이상 묵은 고차수가 발견됐다. 중국 200여 지역에서 봇물 터지듯 오래된 차나무가 나타났다. 인도와 차 종주국 전쟁에서 종지부를 찍어줄 차나무가 드디어 운남성 임창(臨滄)시 봉경(鳳慶)현 향죽청(香竹菁)에서 발견됐다. 해발 2245m에 서식하는 재배종(栽培種) 고차수는 수령(樹齡) 3200년이 넘었다. 전 세계 차나무의 조상이라는 뜻으로 ‘금수차조(錦秀茶祖)’라고 명명됐다.
금수차조의 나이 검증은 2004년 중국 농업과학원차엽연구소 임지(林智) 박사와 일본 농학박사 오모리 마사시(大森正司)가 공동 측정한 결과 3200~ 3500년 사이로 나왔다. 2005년 미국차엽학회 오스틴 회장이 검증한 결과도 동일하게 나오며 최고령 차나무로 공식 인정받았다. 때마침 2억500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찻잎 화석까지 등장하며 차 종주국 논란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지금도 학계에서는 중국이 원산지라는 ‘일원설(一元說)’과 중국과 인도라는 ‘이원설(二元說)’이 공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