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대륙은 러시아의 재무장, 우크라이나의 반격 좌절, 트럼프의 백악관 복귀 가능성 등 트리플 악재가 겹치면서 수십 년 만에 가장 위험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버릴지가 아니라, 미국이 유럽을 버릴 것인지 여부다. 미국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이탈은 유럽에 거대한 공백을 남길 수밖에 없다.
지난 2월 16~18일 세계 최대의 안보분야 국제회의인 뮌헨안보회의(MSC)가 각국 정부 수반 및 장관급 인사 약 150명이 참석한 가운데 독일에서 열렸다. 회의 분위기는 비록 패닉까지는 아니지만 무거운 공포가 짓누른 것으로 알려진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트럼프 2.0 시대에서 미국의 원조가 완전히 끊긴다면, 우크라이나가 패배할 공산이 클 것으로 본다. 우크라이나의 패배는 서방에 심리적 타격을 입히는 동시에 푸틴을 더욱 대담하게 만들 것이다. 롭 바우어 NATO 군사위원장은 비록 우크라이나가 패하더라도 “NATO에 대한 즉각적 위협은 없다”고 말한다. 러시아가 전쟁 이전의 군사력을 회복하려면 3~7년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2월 13일 발표된 에스토니아의 연례 정보보고서는 “향후 10년 이내에 NATO가 소련 시대의 대군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를 담았다. 위협은 단지 러시아의 침공에 국한되지 않는다. 즉 러시아는 NATO의 상호방위 조항인 제5조의 한계를 시험하기 위한 공격과 도발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덴마크 국방장관은 ‘새로운 정보’를 인용하며 “3~5년 이내에 러시아가 제5조와 NATO의 결속력을 시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NATO 회원국들은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름반도를 강탈하자 국방비 지출을 급격히 늘렸다. 그해 NATO 회원국 중 3개국만이 국방비 지출 하한선인 GDP(국내총생산) 대비 2%를 달성했다. 2024년에는 회원국의 60%가 넘는 최소 18개국이 상기 목표를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의 국방비 지출을 구매력 평가(PPP)로 조정하면 러시아와 거의 같은 약 3800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2015년 이후 전투 대대 정체 혹은 후퇴
문제는 이러한 수치가 유럽을 과대평가하는 ‘허수’라는 점이다. 국방비 지출에 비해 전투력은 형편없이 열악하고, 군대 규모도 보잘것없다. 빠르면 2020년대 후반에 나타날 수 있는 러시아의 무력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일례로 2014년 이후 국방비 증가에도 불구하고 NATO 전투력은 놀라울 정도로 열악하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이후 전투 대대의 숫자가 거의 증가하지 않았거나(프랑스·독일은 1개만 추가), 심지어 영국의 경우 5개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작년에 어느 미군 장성은 유럽 국가들이 실전에 배치할 수 있는 군대가 고작해야 수천 명으로 구성된 1개 여단뿐이라고 탄식했다. 이처럼 딱한 사정을 가리켜 이코노미스트는 유럽 군대가 ‘종이 호랑이’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유럽이 어렵사리 전투부대를 창출해 내더라도 전투에서의 효과성(즉 승리)과 장기전에 필요한 다른 요소들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대규모 본부·사령부 운용을 위한 지휘통제 능력, 드론과 위성 같은 정보·감시·정찰(ISR), 공중수송 등의 병참·군수 능력, 1주일 이상 지속가능한 탄약 등이 그것이다. 폴란드가 교훈적 사례다. 폴란드는 유럽 재무장의 ‘대표 주자’ 격이다. 올해 GDP 4% 수준의 국방비 중에서 절반 이상을 무기·장비에 쏟아부을 예정이다. 외형상 폴란드는 유럽에 반드시 필요한 탱크, 헬리콥터, 곡사포, HIMARS 로켓포 등 엄청난 수량의 무기·장비를 쇼핑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부가 일관된 계획을 거의 수립하지 않은데다 인력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무기·장비에 인력을 배치 및 유지할지조차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폴란드의 HIMARS의 사거리는 300㎞에 이르지만, 폴란드 자체의 정보 플랫폼은 원거리 목표물을 감지할 수 없다. 따라서 표적 획득을 위해서는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옵션들 가운데 하나는 유럽국들이 자원을 모으는 것이다. 예컨대 지난 16년 동안 12개 유럽국이 공동으로 3대의 장거리 화물기를 구입하여 운영해 왔다. 지난 1월에는 독일·네덜란드·루마니아·스페인이 패트리어트 방공 시스템에 사용되는 미사일 1000기를 대량 구매하여 비용을 절감하기로 합의했다. 정찰위성 같은 다른 분야에서도 동일한 방식을 택할 수 있다. 문제는 ‘전리품 나누기(dividing the spoils)’에 있다.
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 등 방산기업 보유국들은 계약을 각국의 방산업체들 간에 어떻게 나눌지 합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단기적인 ‘구멍 메우기’와 장기적인 유럽대륙 자체의 방위산업 구축 사이에는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프랑스는 최근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 21개국이 방공 시스템을 공동 구매하는 ‘유럽 스카이 실드 이니셔티브(ESSI)’에 불만이다. 이유는 부분적으로 여기에 미국·이스라엘 발사대와 함께 독일 발사대의 구매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최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유럽이 ‘전쟁 경제’에 돌입할 것을 촉구하자, 프랑스 여당의 벤저민 하다드 의원은 “미국산 장비를 구입한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의 목표 달성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영ㆍ프 핵전력, 미ㆍ러의 10분의1
‘EU 국제안보연구소’의 얀 앤더슨은 최근 발표한 논문에서 유럽 방위산업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덜 세분화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은 미국에 비해 생산하는 종류의 전투기와 공중레이더 항공기의 종류가 적음에도 비효율적이다. 국가마다 무기의 설계 우선순위가 다른 경우도 많다. 프랑스는 항모 탑재가능 제트기와 경장갑차를 원하지만, 독일은 장거리 요격기와 중(重)전차를 선호한다. 그래서 프랑스의 르클레르 전차와 독일의 레오파르트-2 전차를 2030년대 중반부터 대체하기 위한 차세대 주력전차(MGCS)를 양국이 공동 개발하고 있으나, 이런 노력이 성공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국방비 대폭 증액 같은 대규모의 변화는 광범위한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문제를 제기한다. 독일의 재무장은 다른 정부지출을 줄이거나, 또는 헌법 개정이 필요한 ‘부채 브레이크(연방적자를 GDP의 0.35%로 제한)’를 제거하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유럽의 인력 부족 문제도 비슷한 정도의 논란을 일으켰다. 일례로 지난해 12월에 독일의 피스토리우스 총리는 “돌이켜보면(in retrospect) 독일이 2011년 의무복무제를 폐지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1월에는 영국군 수장인 패트릭 샌더스 장군이 서구 사회가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범국가적 과업(whole-of-nation undertaking)”이 될 것이며, 우크라이나가 “정규군이 전쟁을 시작하지만 시민군은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징병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 전국적으로 징병제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몇몇 서유럽 국가들은 민방위와 국가적 대비태세를 강조하는 스웨덴, 핀란드 및 기타 북유럽 국가의 ‘총력안보(total defense)’ 모델을 연구하고 있다.
유럽이 대체하기 가장 어려운 능력은 아마도 유럽국들이 절대로 필요하지 않기를 바라는 핵 능력일 것이다. 미국은 유럽 동맹국 방어를 위해 육상·해상·공중에서 전략핵무기를 투발할 수 있는 핵3원전략(nuclear triad)뿐 아니라, 유럽 전역의 기지에 단거리 ‘비전략 핵무기’(전술핵무기나 F-35 등으로 투하할 수 있는 소형 중력탄)도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돈을 내지 않으면 지켜주지 않겠다”고 공언한 미국 대통령이 유럽 동맹국을 방어하기 위해 미국 대도시를 위험에 빠뜨리며 핵전쟁을 불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핵보유국이지만, 미국의 5000발, 러시아의 거의 6000발에 비해 핵탄두가 500발에 불과하다. ‘최소 핵억제’를 주창하는 낙관론자들은 이것만으로도 모스크바를 비롯한 여러 대도시를 전멸시키기에 충분하므로 푸틴의 무모한 모험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관론자들은 핵탄두 총량에서 러시아에 비해 압도적 열세이고, 영국·프랑스가 입게 될 불균형적 피해가 푸틴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수치상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 핵무기는 이미 NATO에 배치되어 있으며, NATO 핵계획그룹(NPG)은 핵무기 사용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이론상 영국의 억제력은 작전 독립성을 갖는다. 즉 영국은 원하는 대로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은 차세대 핵탄두 설계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10년 전 발표된 초당적 평가에 따르면 미국이 모든 협력을 단절한다면 영국 핵전력의 수명은 “몇 개월 이내로 끝장”날 것이다. 반면 프랑스의 핵무기는 전적으로 자체 개발되었지만 NATO와의 관계가 영국보다 더 냉랭하다. 분명히 NATO의 핵전력 운용계획은 미국의 손에 달려 있다. 만일 미국이 NATO를 탈퇴한다면, 유럽은 핵문제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유럽은 자유를 위한 투자를 해야 한다”
이와 관련 지난 2월 13일 크리스티안 린트너 독일 재무장관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자이퉁(FAZ)’에 ‘유럽은 핵억제를 고수해야 한다(Europa muss an nuklearer Abschreckung festhalten)’는 기고문에서 과거의 ‘평화배당금’은 복지국가 확대에 활용됐지만, 이제 유럽은 ‘자유를 위한 투자’ 시대를 맞이하여 대대적 방향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세계에 핵무기가 존재하는 한 유럽도 권위주의 국가의 협박에 무방비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핵억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파리와 런던은 어떤 정치적·재정적 조건에서 집단안보를 위한 자체 ‘전략적 능력(주: 핵전력)’을 유지·확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를 위해) 어떤 기여를 할 의향이 있는가?”
린트너 장관의 고민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960년대에 미국·유럽은 ‘다자간(multilateral)’ 핵무기의 공동통제 방안을 고민했다. 수십 년 동안 이 논쟁에 참여한 프랑스 전문가 브루노 테르트레이스는 최근 프랑스 핵억제 정책과 관련된 저서에서 영국이나 프랑스가 핵무기 사용 결정을 ‘공유’한다는 생각은 ‘턱도 없는 발상(non-starter)’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프랑스가 NPG에 가입하거나 공중발사 핵무기를 NATO에 할당할 가능성도 낮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한 가지 옵션은 핵억제력이 동맹국을 포함하거나, 적어도 동맹국을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을 양국이 보다 강력하게 확인하는 방안이다. 2020년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의 ‘사활적 이익’, 즉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는 것이 “이제는 모든 유럽의 차원”에 속한 문제라고 말하면서, 이 주제에 대해 동맹국들과 ‘전략적 대화’를 제안했다.
문제는 프랑스의 핵억제력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억제력의 요체는 적대국·동맹국들로 하여금 이런 약속이 위기 때가 되면 내버려질 싸구려의 외교적 제스처가 아니라 진짜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테르트레이스는 다양한 옵션을 제안한다. 프랑스가 어느 파트너와 핵 사용에 대해 협의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다. 보다 급진적 방안으로, 미국의 핵우산이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 프랑스가 유럽 파트너들이 핵탑재가 가능한 샤를드골 항공모함(2038년 이후에는 차세대 항모로 대체) 중심의 핵작전 태스크포스에 동참하도록 초청하거나, 심지어 독일에 핵미사일 몇 발을 배치할 수도 있다. 이러한 옵션은 궁극적으로 ‘공동의 핵기획 메커니즘’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이코노미스트는 독일 관리들의 발언을 인용하여, 린트너가 제기한 ‘다자적 핵무기 공동통제 방안’과 관련된 구상을 대부분 일축했다.
사실 국가별 우선순위, 역사적·정치적 민감성, 위협 인식 면에서 드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유럽국들이 핵독트린 같이 첨예한 이슈에서 컨센서스(유럽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는)를 형성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유럽 맞춤형 핵억제력은 요원한 과제인 셈이다. 또한 프랑스는 자신이 미국에 제기했던 질문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1950년대에 독자 핵개발을 결심한 프랑스는 미국에 이렇게 물었다. “미국 대통령이 파리를 위해 뉴욕을 희생할 것인가?” 이 질문이 유럽에서도 똑같이 반복될 수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탈린(에스토니아 수도)을 위해 파리를 위험에 빠뜨릴 것인가?”
본질적으로 NATO는 정치·외교적 기구이지만 또한 연간 33억유로를 지출하는 막강한 관료조직이기도 하다. NATO에는 유럽연합군최고사령부(SHAPE) 예하에 지상군(네덜란드), 해군(이탈리아), 공군(독일) 사령부가 편제되어 있다. 이들은 유사시 러시아와의 전쟁을 지휘하는 두뇌 집단이다. 만일 트럼프 2기 행정부가 하룻밤 사이에 NATO에서 탈퇴한다면 유럽인들은 이 역할을 어떻게 수행할지 미리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의 싱크탱크인 ‘엘카노왕립연구소(ERI)’의 다니엘 피오트는 ‘유럽연합만의’ 옵션은 별 효과가 없을 것으로 본다. 이유는 부분적으로 EU 자체의 군사 지휘부가 여전히 왜소하고 경험이 부족하며 고강도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국방비를 지출하는 영국·노르웨이·튀르키예 등 비(非)EU·NATO 회원국들이 여기서 제외돼 있기 때문이다.
“독일, 러시아와 전쟁 준비에 5~8년 걸려”
그렇다면 대안은 유럽이 NATO의 구조를 이어받아 미국이 떠나더라도 NATO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관건은 숙련된 장교단의 확보 여부다. 현 시점에서 보면 작전·전략·전쟁 기획의 상당 부분이 몇몇 국가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덴마크 전쟁연구센터(CWS)의 올리비에 슈미트 교수는 유럽국 중에서는 “프랑스, 영국, 그리고 운이 좋으면(on a good day) 독일만이 사단·군단 수준의 작전계획 수립이 가능한 장교단을 파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러시아와 전쟁이 벌어지면 정작 필요한 장교단을 보낼 수 있는 유럽 국가는 이들뿐이라는 말이다. 피오트는 EU 회원국들이 동맹의 최고위 장군이자 관례상 미국인이 차지했던 자리에 특정 회원국 출신 인물을 앉히는 것에 동의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한다.
독일의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국방장관은 “독일이 러시아와 전쟁 가능성에 대비하려면 5~8년이 걸려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다. 이처럼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NATO 회원국의 군대는 독일뿐이 아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해 12월 ‘허약한 유럽 군대와 텅 빈 무기고’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드러난 유럽 주요국들의 문제점을 분석했다. 일례로 미국의 주요 동맹국이자 유럽 제1의 국방비 지출국인 영국이 당장 배치할 수 있는 무기는 탱크 150여대와 장사정포 10여문 등에 불과하다. 지난해에는 박물관에 보관된 여러 대의 로켓 발사기를 업그레이드하여 우크라이나에 기증하는 방안을 고려했지만,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다음으로 많은 국방비를 지출하는 프랑스의 배치 가능한 중(重)야포는 90문 미만이다. 이는 매달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파괴되는 러시아 야포의 숫자와 맞먹는다. 덴마크는 중야포, 잠수함, 방공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독일군의 탄약 보유량은 이틀치에 불과하다.
이처럼 냉전 종식 이후 수십 년 동안 서방 각국의 군대가 허접한 수준으로 쪼그라든 결정적 이유는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미국이 NATO와 유럽의 방위정책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보더라도 미국은 NATO 국방비의 거의 70%를 지출했다. 아직도 유럽 주요국들은 러시아로부터의 즉각적인 군사적 위협은 없으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의 소모전으로 인해 현재로서는 러시아가 견제되고(contained)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면 3~4년 내에 완전히 재무장하여 NATO국들과 충돌할 수 있는 러시아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무기·장비 생산 능력도 현저히 약화되었다. 경제성장 둔화와 인구 고령화로 인해 예산 제약에 직면한 유럽국들은 국방비 증가에 필요한 복지지출 삭감이 불러올 정치적 반대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이와 관련 영국 워릭대학의 앤서니 킹 교수는 유럽에 명백한 안보 위협이 없고, 전 세계에서 미국이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돈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유럽국들이 ‘체계적으로 비무장화(systematically demilitarized)’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잠들어 있다”고 평가했다. 요컨대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의 문제가 얼마나 깊고 심각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독일 탱크 절반이 작동 불가
NATO 데이터에 의하면 회원국들의 국방비는 냉전 시기 연간 GDP의 약 3%에서 2014년에는 약 1.3%로 급감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름반도 침공 이후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지만, 그 속도는 매우 더디다. 유럽 의회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EU의 국방비는 20%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러시아·중국의 국방비는 각각 3배와 6배 가까이 늘었다. 냉전 말기 서독 50만명, 동독 30만명에 달했던 독일군은 현재 18만명으로 줄었다. 1980년대까지 서독에만 7000대 이상의 탱크가 있었지만, 지금은 200대에 불과하고, 그나마 작동 가능한 것은 절반에 불과하다. 또한 독일 방위산업 역량은 매달 3대의 탱크만 생산할 수 있다. 올해 초 독일 의회 군사위원장인 에바 회글(Eva Högl)이 작성한 보고서는 충격적이다. 보고서에 의하면, 독일군 기지에는 무기·탄약뿐 아니라 제대로 작동하는 화장실과 인터넷도 부족하다. 어느 공격용 헬기 부대는 헬멧을 확보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한마디로 지금의 난국이 초래된 가장 큰 이유는 주요 유럽국들이 전쟁을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로 반드시 대비해야 하는 사활적 ‘의무사항’이 아니라, 그저 여러 옵션들 가운데 고를 수 있는 ‘선택사항’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부 독일 장군들은 NATO가 충분한 규모의 병력·장비를 최전선에 충분히 신속하게 전개하지 못하면, 동부전선에서 벌어질 러시아와의 ‘첫 전투’에서부터 패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독일 정부는 러시아 침략 방어를 위한 NATO의 노력에서 ‘중추’가 되기를 바란다. 문제는 독일 유권자의 71%가 유럽 방어에서 ‘리더십 역할’을 맡겠다는 독일의 새로운 목표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NATO의 롭 바우어 군사위원장은 지금은 “어떤 일이 있어도 독일이 방어와 억제력의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독일 국민의 정신적 족쇄(mental blockade)를 풀어야 할 때”라고 역설한다.
아직도 탈냉전의 단꿈에 취해 있는 나라는 독일뿐이 아니다. 대부분의 NATO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냉전 종식 이후 한때 퍼졌던 ‘종말론적 평화에 대한 낙관적 시각’(다시는 전쟁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는 영구평화의 시대가 됐다는 착각)이 지금은 오히려 이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흉기가 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