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프가 시작되던 시기의 골프는 어떤 형태였을까? 그에 대한 힌트를 얻으려면, 잉글랜드 데본에 위치한 로열노스데본(Royal North Devon) 골프클럽에 가보는 것이 좋다.
골프의 고향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그러한 힌트를 찾기는 어렵다. 골프의 ‘성배’라는 그곳은 이미 관광지화되었고, 전 세계의 골퍼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골프코스 관리가 현대화되었다. 7개의 세인트 앤드루스 링크스 코스에는 온갖 최신 코스 관리 장비가 있다. 풀타임, 파트타임과 교육생까지 합하면 그린키퍼가 150명이 넘는다. 때문에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골프의 원형을 짐작하기 어렵다.
영국 전역에 골프코스가 본격적으로 생긴 때는 19세기 후반이다. 미국에는 그보다 조금 늦은 20세기 초반에 많은 골프코스가 만들어졌다. 19세기 후반에 골프가 스코틀랜드를 벗어나 영국 전역으로 퍼진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이유는 산업화의 결과로 레저를 즐기는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골프채와 골프공이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여 비용이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1850년대 이전의 골프공은 가죽에 새털을 넣어 정교하게 박음질했기 때문에 공 하나 가격이 골프채 하나 가격과 같았다. 셋째 이유는 철도의 발전이다. 철도가 생기면서 레저를 즐기는 사람들이 멀리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골프코스가 있는 곳으로 철도가 연결되었고, 철도와 인접한 곳에 골프코스가 생겼다. 몇몇 골프클럽은 기차역을 클럽하우스로 이용했고, 몇몇 골프클럽의 클럽하우스는 기차역이 되었다.
로열노스데본 골프클럽은 1864년에 골프코스를 만들었는데, 이는 스코틀랜드가 아닌 잉글랜드에 만들어진 최초의 골프코스다. 최초의 잉글랜드 골프코스가 레저 교실이 많고 교통편이 좋은 런던 근교가 아닌 노스데본에 생긴 것은 의외다. 노스데본은 지금도 교통편이 불편하고, 런던에서 차로 4시간이 넘게 걸린다. 골프코스가 많이 생기게 된 이유와 거리가 먼 노스데본에 최초의 잉글랜드 골프코스가 생긴 이유를 설명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이곳 지형이 큰 작업 없이 골프코스로 조성이 가능한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로열노스데본 코스는 최초의 골프가 어떻게 플레이되었는지 짐작하기에 좋은 곳이다.

초식동물과 골프코스의 관계를 이해하다
골프코스는 바닷가 모래사장과 농경지 사이의 경작이 불가능한 땅에 만들어졌다. 모래 지반이어서 작물 재배가 가능하지 않았고, 저지대여서 바닷물이 종종 침범했다. 소금기가 올라오는 상황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은 마람그래스와 페스큐그래스였다. 페스큐그래스는 토끼, 양과 말이 좋아하는 풀이었다. 동물이 풀을 뜯어먹으면서 잔디는 짧게 유지되었고, 산책이나 운동하기에 좋았다.
노스데본의 웨스트워드호(Westward Ho) 해변이 정확히 그렇다. 동네 사람들은 이곳 해변 공유지에서 양과 말을 쳤다. 모래언덕도 높지 않아 멀리서도 양떼나 말의 움직임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 골프 전문가가 보기에 이곳은 골프가 시작된 곳과 비슷했다. 그렇게 골프코스가 만들어졌다. 지금도 공유지이므로 양과 말을 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양과 말에게 주의를 당부할 방법도 없다.
골프코스에 있는 양과 말은 공에 맞을 위험에 노출된다. 양과 말이 많다면 배설물이 지천으로 널릴 가능성이 높다. 방법은 하나다. 골퍼의 공이 떨어지는 지역을 미리 짧게 깎아놓는 것이다. 그러면 양과 말이 코스에 덜 들어오게 된다. 로열노스데본 골프클럽은 페어웨이만 잔디를 짧게 깎는다. 나머지 부분은 동물이 풀을 뜯어먹게 한다. 양과 말은 놀랍도록 짧게 풀을 뜯는다. 기계로 잔디를 깎은 페어웨이와 동물이 뜯어먹은 러프의 잔디 길이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어웨이에 동물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배설물이 페어웨이에 있으며, 곳곳에는 말발굽 자국도 있다. 러프와 러프 사이를 동물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린을 통과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린 주변에는 양 눈높이에 맞게 줄이 쳐져 있다.
로열노스데본에 도착해 보니 1번 홀과 18번 홀은 물에 잠겨 있었다. 오전에 비가 조금 왔지만, 그 정도 비에 골프장이 잠긴다면 이곳은 링크스 골프코스라고 말하기 어려워 보였다. 골프를 칠 수 없을 것을 걱정하는 우리에게 골프클럽 직원은 “30분이 지나면 물이 빠질 것이다”라고 했다. 믿기지 않았지만, 차를 한잔 마시는 사이에 물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골프가 시작되었다. 물은 빠졌지만 벙커에는 여전히 물이 남아 있었고, 1번 홀에는 약간의 캐주얼 워터가 남아 있었다. 동물의 배설물이 신경 쓰였지만, 러프에 있는 양과 말은 정겨웠다. 2번 홀 그린에서 방파제가 보였다. 바닷물이 목초지에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다. 평탄하기만 한 코스인 줄 알았지만 3번, 4번, 5번, 6번, 7번, 8번 홀과 바다 사이에는 비교적 높은 모래둔덕이 있었다. 모래둔덕은 방파제가 없어도 바닷물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보였다. 그중 가장 높은 홀인 6번 홀은 알프(Alp)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페어웨이와 러프는 여느 링크스 골프코스처럼 언듈레이션이 심해서 링크스 코스의 재미를 만끽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코스 중간중간에는 수로가 있었고 저지대에는 워터 헤저드가 있었다. 링크스 골프코스에서 발견되기 어려운 특징이었다. 중간에 비가 왔고, 바다 안개가 코스로 올라오기도 했으며,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기도 했다. 변화무쌍한 날씨였다. 링크스 코스를 아름답게 만드는 마람그래스는 하단부는 잔디 색이며 상단부는 갈대 색이다. 그러나 이곳의 마람그래스는 거무튀튀하여 아름답지 않았으며, 먹구름 속에서는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러 차례 우리의 공은 페어웨이를 벗어나 러프에 떨어졌고, 그때마다 풀을 뜯기에 여념이 없는 동물들과 마주쳤다. 페어웨이와 러프의 구분도 정확하지 않아서 우리는 양과 말이 있는 곳을 러프라고 말하기로 했다.
양과 말이 있는 곳에도 잔디는 꽤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다른 풀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야생에서 다른 풀의 성장을 억제하고, 잔디의 성장을 돕는 방법이 궁금했다.

모래의 특성과 바닷물의 역할을 이해하다
12번 홀에서 18번 홀까지는 다시 평지였다. 우리의 공은 간혹 수로에 빠졌다. 수로가 많다는 사실에 조금 짜증이 났다. 골프코스의 재미를 충분히 만끽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골프가 끝났고, 일행 중 한 명이 잃어버린 드라이버 커버를 찾으러 갔다. 그동안 18번 홀 그린에서 뒤 조의 플레이를 구경했다. 그들은 18번 홀을 공략하는 법을 정확히 잘 알고 있었고 퍼팅라인도 훌륭하게 읽어 냈다. 이곳 회원임에 틀림없었다. 인사를 걸어온 그들에게 물었다. “이곳은 링크스 코스가 맞나요?” “맞죠! 전형적인 링크스 코스죠!” “그런데 어떻게 벙커에 물이 있고, 중간중간에 수로가 많죠? 빗물이 모래층을 통과하지 않고 코스 저지대에 머물러 있는 이유가 궁금해요.” 그들은 웃으며 대답했다. “저것은 빗물이 아니고, 바닷물이에요. 이곳은 봄에 만조 수위가 가장 높아요. 그때가 되면 바닷물이 모래 밑에서 올라와요. 방파제 때문에 넘어오지 못하는 바닷물이 모래층을 뚫고 밑에서 올라오죠. 봄에만 일시적으로 그래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자연은 모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고, 골프코스도 그렇다. 우리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자연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골프코스도 그렇다. 모래는 빗물을 땅으로 흘려 보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조 만조 때는 밑에서 바닷물을 통과시켜 위로 올려 보내기도 한다. 골프코스에 잔디 이외의 다른 식물이 많지 않은 이유도 납득이 되었다. 소금기에 강한 마람그래스와 페스큐그래스를 제외하고 나머지 풀은 봄에 올라오는 바닷물 때문에 잘 자라지 못한다. 수로가 있는 이유와 저지대에 물이 고여 있는 이유도 설명되었다. 마람그래스의 색깔이 거무스름한 것도 이해되었다.
바닷물이 이 골프코스의 제초제이며 해충제인 셈이다. 모든 것을 알고 나니 이 골프코스를 충분히 즐기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시 한번 플레이하고 싶었지만, 해는 대서양 건너편으로 넘어가려는 참이었다.
어거스타내셔널과 정반대의 코스 관리
클럽하우스에 들어오니 마스터스대회가 중계되고 있었다. 마스터스는 특별하다. TV로 전달되는 어거스타내셔널 코스의 잔디는 비현실적인 녹색이었다. 현대 미술가가 세상에 없는 색을 창조한 것처럼 느껴졌다. 선도 현대적으로 해석한 듯이 보였다. 그린 라인, 벙커 라인과 페어웨이 라인은 곡선도 직선처럼 보일 정도로 간명했다. 하얀색 벙커 모래에서도 예술적 터치가 느껴졌다. 어거스타내셔널의 벙커 모래는 일반적인 모래가 아니라 노스캐롤라이나 광산에서 가져오는 수정(quartz) 가루다.
페어웨이에는 디봇이 없으며, 티샷 박스에도 디봇 자국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저녁이 되면 디봇이 있는 부위의 잔디를 원통형으로 떼어 내고 그곳을 새로운 잔디로 메우는 작업을 진행한다. 디봇이 다음 날 경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디봇 수리를 얼마나 강조해 놓았는지 떨어져 나간 잔디 조각을 가져다 메우는 작업을 선수와 캐디가 빼놓지 않고 했다. 보통의 대회에서는 크게 잘려 나간 잔디는 가져다 메우지만, 작은 잔디 조각은 무시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스터스에서는 선수가 앞장서 작은 잔디 조각조차 수리하고 지나갔다. 그렇게 하고도 경기 중에 완벽하게 수리가 되지 않은 디봇이 있다면, 녹색 모래를 뿌려 디봇처럼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영국 골퍼는 잘 관리된 인랜드 골프코스를 ‘너무 완벽한(too perfect)’ 또는 ‘완벽하게 손질된(perfectly manicured)’ 코스라고 부른다. 어거스타내셔널이 대표적인 예다. 세상의 많은 골프코스가 어거스타내셔널의 코스관리를 따르려고 한다. 로열노스데본 골프코스는 반대를 지향한다. 로열노스데본에서 오후에 골프를 치고, 저녁에 마스터스를 시청하려는 계획은 훌륭했다. 두 골프코스의 대비가 뚜렷했고, 그로 인해 골프 역사와 골프코스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어거스타내셔널의 골프는 모든 골퍼가 플레이를 꿈꾸는 최상위 현대 골프다. 로열노스데본은 과거 골프로 골프의 원형에 가깝다. 현재를 살기 위해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듯이 현대의 골프를 즐기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골프를 경험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이유로 로열노스데본은 반드시 플레이해 봐야 하는 골프코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