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신자는 처벌한다.’ 조폭 영화 대사 같지만, 형법 제355조 제2항이 정하고 있는 배임죄 조항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배임죄 폐지론, 배임죄 완화론이 나오고 있다. 지난 정권 때는 검사 출신인 이복현 금감원장이, 이번 정권으로 넘어와서는 여당인 민주당 의원들이 배임죄 폐지나 완화를 언급하고 있다. 여야와 좌우를 넘어서 공감대가 이뤄지고 있는 드문 사안이다. 왜 그럴까.
법은 처벌하기 위해 존재할까, 아니면 처벌하지 않기 위해 존재할까? 보통의 법감정과 거리가 있는 질문 같다. 법은 당연히 처벌을 위해 존재해야 하지 않나. 그러나 근대법은 정반대로 ‘처벌하지 않기 위해’ 태어났다. 정확히는 ‘마구잡이로 처벌하지 말자’였다. 근대 이전에 형사처벌은 국가 권력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사또가 딱 봐서 나쁘면 처벌했다. 사또가 누구냐에 따라 나쁜 짓의 기준도 달랐다. 이런 재량권은 당연히 악용되었다. 이를 막기 위해 미리 정해진 법에 따라서만 처벌할 수 있다는 생각, 즉 죄형법정주의가 나왔다. 프랑스 인권선언 제8조에서 선포된 혁명적 사고였다. 법으로 미리 정하지 않으면 나쁜 짓이라고 하더라도 처벌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이제 배임죄 조항을 보자. 형법 제355조 제2항에는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면 배임이라고 한다. 임무에 위배, 즉 자기 임무를 배신하여서 ‘재산상의 이익’, 즉 돈을 벌면 배임이란 의미다. 한마디로 ‘배신자는 처벌한다’이다. 문제는 도대체 무엇이 ‘배신’인지 법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기죄와 비교해 보자. 형법은 ‘사기’를 ‘기망’으로 정의한다. 속인다는 말이다. 사실과 다른 말을 하면 기망이고 속임수다. 사실이냐 아니냐만 판단하면 된다. 반면 배신이냐 아니냐는 사실판단만이 아니라 가치판단의 영역이다.
예를 들어 보자. A가 B에게 땅을 팔고 중도금까지 받았다. 그런데 C가 더 큰돈을 제시한다. A는 C에게 땅을 팔고 등기를 넘겨줬다. 이런 A의 행동은 배임일까? 대법원은 이런 ‘이중매매’를 배임죄로 처벌한다. 반면 은행 돈 빌려서 못 갚았다고 형사처벌 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민사 문제로 끝난다. 양자는 약속을 어겼다는 점에서 같다. 그런데 왜 이중매매만 배임으로 형사처벌 하는가. 납득이 쉽지 않다.
기업 경영 사례는 더 복잡하다. A회사는 B회사 주식 40%를 가지고 있고, B회사가 망하면 이 주식을 날릴 판이어서, 자금난을 겪고 있는 B회사에 돈을 빌려줬다. 그러나 불행히도 B회사는 결국 망했고, A회사는 B회사에 빌려준 돈과 주식 40%를 모두 날렸다. A회사 대표는 배임을 하였나? 배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C기업은 요즘 대세인 AI 사업에 진출하기로 했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한 실패였다. C기업 대표의 잘못된 투자 판단은 배임인가? 역시 배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경영판단과 배임의 경계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따라 법이 미리 정한 나쁜 짓만 처벌해야 한다. 그래야 재량권으로 처벌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은 곧 재량권이 판사에게 있다는 의미이다. 죄가 되는지 아닌지 알 수 없기에 그 결과는 경영인의 위험회피로 귀결된다. 자리를 지키면서 임기 마칠 때까지 월급 받으면 그만인데, 굳이 배임 범죄자가 될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배임죄 폐지론에는 강력한 비판점이 있다. “그럼 나쁜 짓을 해도 그냥 두라고?” 타당한 말이다. 법의 중요한 존재 이유가 또 하나 있기 때문이다. 법이 무서우니까 죄짓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는 역할이다. 배임죄가 존재하기에 ‘나쁜 짓’이 방지되는 효과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문제는 도대체 무슨 나쁜 짓이 ‘배신’인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사기죄는 “남들을 속여서 돈 뜯어내지 마”라고 경고한다. 반면 “배신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반응은 두 가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그냥 맘대로 하거나, 무슨 말인지 모르니 아무것도 안 하거나. 결국 경고의 의미는 퇴색된다.
그렇다고 배임죄가 있어야만 범죄를 처벌할 수 있지도 않다. 형법에는 이미 다른 조항들이 있다. 아까의 예로 돌아가자. B회사에 돈을 빌려줬다가 못 받은 A회사 대표는 어떻게 처벌할 수 있을까. 이사회에 B회사의 신용에 대해서 허위로 보고한 사실이 있다면 사기죄로 처벌하면 된다. 만약 모든 정보를 정확하게 공개해서 이사회를 통과했다면, 형사처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대표에서 해임하거나 손해배상으로 해결하면 된다. AI 사업에 진출했다가 실패한 C기업 대표도 마찬가지다. 이사회에 허위 보고서를 제출했다면 사기죄로 처벌하면 된다.
물론 다른 법 조항이 배임죄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일부 나쁜 짓은 형사처벌 대상에서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잘못을 형사처벌로 다스릴 필요는 없다. 민사적으로 손해배상을 물을 수도 있고, 자리에서 해임할 수도 있다. 형사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다.
근대법의 정신과 ‘춤추는 칼’
배임죄가 죄형법정주의에 반한다는 주장은 예전부터 있었다.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이라는 주장도 몇 번 제기되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주장은 배척했다. 헌법재판소의 논리는 “법원이 알아서 잘 판단할 것이다”로 정리할 수 있다. 인간 판사의 재량에 맡겨도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근대법의 정신은 ‘인간의 지배에서 법의 지배로’의 전환이다. 과연 ‘배신자는 처벌한다’는 배임죄 조항이 근대법의 정신에 부합하는가. 배임죄는 춤추는 칼과 같다. 어디로 어떤 스탭을 밟을지 모른다. 누구든 벨 수 있고, 누구를 벨지 모른다. 기업인도 일반 시민도 모두 그 칼 앞에 설 수 있다. 이제는 그 칼을 칼집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