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론’에 맞대응해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평화적 두 국가론’을 언급하면서 정치권에 파장을 낳고 있다. ‘평화적 두 국가론’의 기원은 ‘비전의 정치가’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라고 볼 수 있다. “독일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지만 서로 외국이 아니라 특수한 관계에 있다.” 이는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신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연방의회에서 동서독 관계를 ‘한 민족 속 두 국가’로 규정하면서 연설한 내용이다.
빌리 브란트는 ‘서방정책’을 추구한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서독 총리 이후 내려온 ‘할슈타인 원칙’(동독과 수교한 국가는 외교 단절)을 버리고 동독을 하나의 주권국가로 인정해 대화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법적’ 승인이 아니라 ‘사실상(De facto)’의 승인에 불과했다. 브란트는 동서독을 정치적으로 두 국가지만, 민족적으로는 하나의 독일로 규정했다. 통일을 단기 목표가 아닌 장기적·점진적 과정으로 보고, 분단 현실을 인정하면서 민족 연대와 통일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이다.
‘두 국가론’의 원조 빌리 브란트
이때 브란트의 정치적 동지이자 동방정책 설계자 에곤 바르는 ‘접근을 통한 변화’란 기치를 내걸고 장관 및 특사로 공을 세웠다. 바르는 1970년 ‘특사’로 사회주의 맹주국인 소련의 모스크바를 방문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만나 양국 정상회담을 주선하고 서독·소련 간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는 데 기여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국경 인정(오데르·나이세선), 무력사용 금지와 분쟁의 평화적 해결, 양국 간 관계 정상화가 핵심내용이었다.
여세를 몰아 빌리 브란트는 1971년 화해의 상징인 ‘바르샤바 무릎 꿇기’를 통해 폴란드와 ‘조약’을 체결하고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듬해인 1972년에는 동독과 영토·주권·독립성 인정, 상주대표부 설치와 교류·협력, 유엔(UN) 동시 가입을 골자로 하는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1973년 동서독은 유엔에 동시 가입했고, 1974년 동독은 미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이어 1975년 미·소·동서독 등 35개국이 함께 참여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헬싱키협정을 차례로 맺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미국이란 든든한 뒷배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빌리 브란트에 이어 집권한 사민당 헬무트 슈미트 총리와 기민당 헬무트 콜 총리는 ‘동방정책’을 계승 발전시켰다. 이데올로기 및 정파를 초월했다. 심지어 중도우파 기민당 출신의 헬무트 콜은 중도좌파 사민당 출신 빌리 브란트를 ‘멘토’로 삼고 수시로 자문을 구해 ‘독일 통일의 주역’이란 칭호를 거머쥐었다. 브란트가 통일의 씨앗을 뿌리고 과실은 콜이 따먹은 셈이다.
새 시대를 여는 데 미국·소련보다 늘 ‘반 발짝’ 앞섰던 빌리 브란트는 새 ‘시대정신(Zeitgeist)’을 파악해 데탕트를 추진하면서 독일과 유럽 역사를 일순간에 바꾸어 놓았다. 그의 ‘동방정책’은 세계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 이민자 출신의 헨리 키신저가 설계한 ‘핑퐁외교’로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마오쩌둥 중국 주석이 만났다. 닉슨과 마오쩌둥의 만남은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고, 같은해 박정희 대통령은 김일성 당시 북한 수상과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후 동서독은 국가와 민족을 넘어 유럽 차원에서 탈냉전과 협력을 창조했고, 실핏줄을 잇는 이산가족 상호방문과 경제협력 등 관계를 심화 발전시켰다. 반면 한반도에서 남북관계는 지속 발전하지 못하고 좌초됐다. 이를 두고 독일의 저명한 언론인 테오 좀머는 남북 관계를 ‘고 앤드 스톱(go and stop)’이라고 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는 뜻이다.
독일의 ‘동방정책’은 어떻게 성공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포함한 우리의 남북정책은 왜 실패했는가?
먼저 정치지도자들의 지혜와 역량 차이다. 빌리 브란트 등 서독의 정치지도자들은 ‘두 국가론’을 제기했지만, 이념을 초월해 새 국제질서를 선도해 ‘한 국가’를 만들 수 있는 전략과 능력이 있었다. 반면 한반도 최고권력자들은 ‘말로만 통일’을 외치는 일회성 이벤트에 그쳤다.
다음으로 통일 정책의 업그레이드와 전략 차이다. 독일은 1950년대부터 동서독 교류가 활발했다. 동서독은 1956년부터 멜버른, 로마, 도쿄올림픽 등 3차례 단일팀을 구성해 출전했다.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 호주 시드니올림픽에서 남북한이 한반도기를 들고 ‘아리랑’을 들으며 공동 입장한 이벤트보다 44년 전의 일이다.
빌리 브란트는 여기에 더해 ‘진짜’ 동서독 교류 협력인 ‘신동방정책’에 나섰다. 먼저 ‘전독부(전독일문제부)’를 ‘내독부’로 변경했다. 우리와 굳이 비교하면 ‘통일부’를 ‘남북협력부’로 바꾼 셈이다. 특히 한·독 통일정책 간 전략 차이는 독일은 동서독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실핏줄 연결에 올인했고, UN 동시 가입, 동독·미국과의 수교, 헬싱키조약 가입 등 동독을 국제무대로 이끌어냈다. 남북 정상들끼리 만찬과 이벤트에만 의존한 우리 방식은 실패했다.
삼국통일 김춘추에게 배우는 ‘신문명전략’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재집권과 함께 다극혼돈의 국제질서가 펼쳐지고 있다. 한반도 평화번영통일의 시대를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브란트가 주는 시사점은 ‘국가·민족과 함께 인류공영’이라는 통 큰 정치와 ‘국민주권’ 원칙을 실천하는 것이다. 미·중 패권경쟁 및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시기에 새 그랜드 전략이 필요하다.
이제는 남북한 지도자들도 통 큰 결단과 행보가 요구된다. 브란트처럼 이재명 대통령은 ‘한반도 특사’를 임명해 담대한 전략과 돌파가 필요하다. 트럼프가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전후로 김정은에게 보인 ‘상남자(manly man)’의 과감한 행동을 이제는 이재명 대통령이 보여줄 차례다. 트럼프의 ‘페이스메이커’가 아닌 앞서가는 ‘피스메이커’가 되는 일이다.
이번 경주 APEC 정상회의는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아쉬운 대목은 트럼프와 김정은의 만남이 성사되지 못한 점이다. 천년 고도(古都) 경주의 진짜 정신은 ‘화백회의’뿐 아니라 신라·백제·고구려 3국 전쟁의 시대를 끝내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춘추의 리더십에서 찾을 수 있다. 당대 최강국을 파악해 활용하고 승리하는 담대한 국제리더를 말한다.
국제정세는 혼란하지만 ‘그 너머의 세상’인 새 국제질서가 태동하고 있다.김정은 위원장 역시 핵(核)에 집착해 실기하지 말고 중·러 정상뿐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과 다카이치 일본 총리와도 마주앉길 권한다. 강대국 체스판의 ‘졸(卒)’이 아니라 ‘주체’가 되는 것은 아버지 김정일의 유훈 아닌가. 미·중 전략경쟁 시기 남북 지도자들이 새 한반도·아시아·태평양 질서를 그려갈 호기이며 ‘신문명전략’을 추구할 때다. 트럼프와 남북 정상이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는 장면이 멋지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