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최민희 위원장이 딸 결혼식 관련 질의를 듣고 있다. photo 뉴스1
지난 10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최민희 위원장이 딸 결혼식 관련 질의를 듣고 있다. photo 뉴스1

국회 과학기술방송정보통신위원회의 국정감사장에서 느닷없이 ‘양자역학’과 ‘조절 T세포’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물론 ‘꿈의 컴퓨터’로 알려진 양자컴퓨터의 개발에 필요한 ‘양자 기술’이나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의 수상 업적인 ‘면역학’에 대한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가 과방위 국감에서 도마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감장의 현실은 정반대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방송·언론 정책에 대한 여야의 첨예한 대립과 치열한 갈등으로 파행을 거듭하는 과방위에서 양자 기술과 같은 ‘과학기술’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다. 국감에 소환된 수십 명의 과학자들은 하루 종일 인내력을 시험당하다가 씁쓸한 기분으로 귀가해야만 했다. 물론 예상했던 일이었다.

 

핑곗거리가 돼버린 양자역학

과방위 국감에 현대 물리학과 면역학의 낯선 용어가 등장한 이유가 엉뚱했다. 부끄러운 가정사 등으로 낯 뜨거운 구설수에 휩쓸린 최민희 과방위 위원장의 해괴망측한 변명이 문제였다. ‘문과’ 출신인 자신이 매일 난해한 양자역학과 양자 내성(耐性) 암호를 공부하고, 암호 통신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느라 정작 자녀의 혼사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 위원장이 소홀히 했던 것은 정작 자녀의 혼사가 아니었다. 국회의원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김영란법 등을 외면했던 것이 문제였다. 최 위원장이 굳이 양자역학을 들먹인 이유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양자컴퓨터 시대를 준비하는 과방위 위원장의 책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기 위해 자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자연건강법이라는 엉터리 유사과학 확산에 앞장섰던 최 위원장의 양자역학 회귀는 놀라운 변신이다. 사학과를 졸업하고, 월간지 기자 생활을 했던 65세의 위원장에게 양자역학은 자녀의 결혼식을 잊어버릴 정도로 몰입해야 할 만큼 충분히 난해한 분야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는 뜻이다. 미래 기술인 양자 암호와 암호 통신은 만약을 대비한 안전장치였을 것이다.

물론 양자역학이 난해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천재 물리학자로 알려진 리처드 파인만조차 “양자역학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역시 천재 물리학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마지막까지 양자역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양자역학이 누구에게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과학이라는 뜻은 아니다. 누구나 양자역학을 파인만이나 아인슈타인처럼 근원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양자역학의 제1원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단순한 응용·활용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문과 출신은 물론 물리학자가 아닌 이공계 출신이 대부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양자역학만 그런 것이 아니다. 초등학생도 알고 있는 중력의 법칙도 마찬가지다. 달과 지구가 서로 끌어당기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알아낸 것은 1687년 아이작 뉴턴이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인정하고 나면 누구라도 달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이유와 구체적인 방법을 비교적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뉴턴은 만유인력이 나타나는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다. 만유인력이 나타나는 근원적인 이유를 밝혀낸 것은 1916년 아인슈타인이었다. 시간과 공간이 ‘시공간’으로 연결되어 있고, 질량이 그런 시공간을 휘어지게 만들어서 중력이 나타난다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알아내는 데는 229년의 긴 세월이 필요했다. 만약 시공간의 휘어짐까지 이해하려고 애를 썼더라면 뉴턴도 자녀의 결혼식을 챙길 여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정치인에게 필요한 양자역학

올해는 양자역학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유엔이 정한 ‘세계 양자 과학기술의 해’다. 사실 ‘양자(量子)’의 개념이 처음 탄생한 것은 1900년이었다. 독일의 막스 플랑크가 온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흑체 복사의 에너지 분포를 설명하기 위해 ‘양자(quantum)’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물질이 방출할 수 있는 빛의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있다는 가설을 도입해야만 흑체 복사의 에너지 분포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25년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에르빈 슈뢰딩거가 플랑크의 양자 가설을 수학적으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행렬역학과 슈뢰딩거 방정식을 완성했다.

결국 양자역학의 가장 독특한 특성은 에너지와 운동량의 ‘양자화’다. 에너지와 운동량이 연속적인 값을 가질 수 있는 고전역학과 달리 양자 입자의 에너지와 운동량은 경계조건에 의해 불연속적인 특정한 값만 가질 수 있다. 장미꽃이 화려한 붉은색으로 빛나는 것도 전자의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非)전문가가 그런 양자역학을 공부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양자역학이 우리가 오감을 통해 직접 경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아이작 뉴턴의 고전역학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된다. 그리고 양자역학이 적용되는 미시 세계에서는 입자와 파동의 구분이 애매해진다. 모든 것이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기도 한 ‘이중성’이 나타난다.

양자역학적 상태에 대한 해석도 복잡해진다. 양자역학으로 설명하는 시스템은 일반적으로 허용된 상태의 ‘중첩’으로 존재한다. 측정을 하기 전에는 시스템이 어떤 허용 상태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 없다. 상자 속의 고양이가 살아 있기도 하면서 동시에 죽어 있기도 하다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이 바로 그런 상태를 나타낸다. 중첩 상태로 존재하는 양자 시스템에 대한 측정 결과를 해석하는 방법도 간단하지 않다. 파동함수의 ‘붕괴’로 해석하기도 하고, 다중 우주에서 만들어지는 ‘가지’로 설명할 수도 있다.

양자 현상에 대한 인문학적 비유는 제한적일 수 있다. 최민희 위원장이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밝힌 ‘조절 T세포’에 대한 비유적 해석이 그렇다. 악의적 허위·조작 정보가 사회적 가치관을 병들게 하는 ‘암세포’이기 때문에 결국 깨어 있는 시민이 ‘똑똑한 조절 T세포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언제나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인과성·상관성을 확인할 수 없는 막무가내식 비유·은유는 전형적인 문과형 논리 전개 방식일 뿐이다.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고전역학이 ‘무너졌다’는 주장도 위험한 것이다. 세상 모든 일에 적용될 것이라고 믿었던 고전역학의 적용 범위가 사실은 거시적 물체의 운동으로 한정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뿐이다. 오늘날에도 고전역학은 거시적 물체의 느린 움직임을 설명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더욱이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해석이 고전역학과 절대적으로 상충되는 것도 아니다. 양자역학의 설명이 입자의 질량이나 크기가 충분히 커지면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설명과 동일해진다는 ‘대응 원리’가 있다. 그러나 확률론적 양자역학으로 표현되는 물리적 실재(實在)의 의미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양자역학이 난해하다는 선입견은 일방적인 것이다. 누구나 파인만이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물리학자를 흉내 내야 할 이유가 없다. 양자역학을 이용한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정치인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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