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겨울 메이저리그 자유계약선수(FA) 시장에서 주목받는 선발투수 중에 익숙한 이름이 있다. 바로 과거 SK 와이번스(현 SSG)에서 외국인 에이스로 활약한 메릴 켈리다. 켈리는 올겨울 37세 나이에 처음 FA 자격을 얻어 시장에 나왔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켈리를 바라보는 현지 평가는 굉장히 좋다. 스포츠 매체 디애슬레틱의 필자들이 매긴 FA 랭킹에서 켈리는 전체 20위에 배치됐다. 선발투수 중에서는 전체 8위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한 번도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아보지 못했고 트리플A에서만 뛰었던 투수가 4년간 한국 생활을 거친 뒤 미국 무대로 돌아가 거액을 받는 선발투수로 거듭난 것이다.
올겨울에도 제2의 켈리를 꿈꾸는 KBO리그 외국인 선수들이 대거 메이저리그 재도전에 나설 전망이다. 미국 현지 매체에서 이름이 거론되는 선수만 5명이나 된다. 투수 4관왕으로 올 시즌 리그를 지배한 코디 폰세(한화)를 비롯해 홈런왕 르윈 디아즈(삼성), 제임스 네일(KIA), 폰세와 함께 한화 이글스를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이끈 라이언 와이스(한화), 리그 탈삼진 2위 드루 앤더슨(SSG)이 미국 구단들의 관심을 받는 선수들이다.
꾸준한 기회 제공하는 KBO
1998년 외국인선수 제도를 처음 도입할 당시만 해도 한국야구는 한물간 선수들이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 목돈을 만지기 위한 무대였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절대 통하지 않을 수준의 선수, 실패한 유망주, 기량이 쇠퇴해 더 이상 뛸 곳이 없는 노쇠한 선수들이 한국야구로 건너왔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지금은 분위기가 달라졌다. 최근에는 한국야구가 종착지가 아닌 새로운 도약대로 바뀌어 가는 흐름이다. 메릴 켈리가 가장 대표적인 예다. KBO리그를 지배한 뒤 3년 1600만달러 계약으로 메이저리그 복귀에 성공한 에릭 테임즈(NC) 같은 사례도 있다. NC 다이노스는 이후 드류 루친스키·에릭 페디·카일 하트까지 외국인 에이스가 3년 연속 미국 구단과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고 돌아가는 사례를 만들었다.
2024시즌 두산에서 뛰었던 제러드 영과 브랜든 와델은 함께 뉴욕 메츠 계약을 체결했다. 한 메이저리그 구단 관계자는 “이제 KBO리그는 미국야구의 중요한 선수 공급처가 됐다”면서 “빅리그 로스터에서 뛸 만한 선수는 물론 트리플A 로스터를 채우는 용도로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전했다. B 구단 동아시아 스카우트는 “여러 면에서 트리플A보다 KBO리그가 선수로서 성장하기에 더 좋은 환경”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KBO리그는 왜 외국인 선수들의 재기 무대로 떠오른 것일까.
지방 구단에서 외국인 선수 담당 업무를 여러 해 수행한 관계자는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려고 설득할 때 가장 많이 어필하는 부분 중 하나는 ‘여기서는 지속적인 출전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라고 했다. 마이너리그 옵션이 남아있는 선수들을 빅리그에 부상자가 생겼을 때 올려서 잠깐 사용하고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한다. 빅리그에서 벤치만 지키다 언제 다시 마이너리그로 내려갈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생활한다. 실제로 과거 두산에서 활약한 조시 린드블럼은 미국 매체 팬그래프와 인터뷰에서 “여기엔 기회가 있다. 투수로서 5~6일마다 공을 던질 수 있는 기회 말이다”라며 “많은 AAAA급 선수들에게 필요한 게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꾸준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다 보면, 빅리그 허들을 넘기가 정말 어렵다.”
과거 한화에서 활약한 채드 벨도 같은 인터뷰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다. 벨은 “미국에서는 한 번 실패하면 마이너로 내려간다. 반면 한국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얻는다”라고 강조했다. 한국야구에 오는 외국인 선수들은 거의 대부분 팀의 에이스 역할, 중심타자로 풀타임 출전 기회를 받는다. 선발투수는 한 시즌 30경기에 꾸준히 선발로 등판하고, 타자는 144경기에 선발 출전한다. 미국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을 기회다.
선발투수의 경우 5~6일에 한 번씩 등판해 꾸준히 6이닝 이상 던질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최근 마이너리그에는 선발투수 한 사람에게 경기 전부를 맡기지 않는 추세다. 선수는 많고 경기는 제한적이다 보니 두 명의 선발투수가 한 경기를 나눠 던지는 식으로 운영한다. 6회는커녕 5이닝을 채울 기회도 많지 않다. 풀시즌을 뛰어도 130이닝 정도를 소화하는 경우가 많다. 올해 NC 다이노스에서 풀타임 선발투수로 활약한 라일리 톰슨은 시즌 막판 인터뷰에서 “이렇게까지 많은 이닝을 던져본 적이 없고, 많은 삼진을 잡아본 적이 없다”고 털어놨다. 톰슨은 “NC에서 기회를 받고 배워나가는 과정이 있었다. 어떻게 체력 관리를 해야 하는지도 배웠다”고 말했다. 톰슨은 “이전까지 150이닝 이상을 던져본 적이 없다. 회복을 잘하고 체력을 아끼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선발투수로서의 ‘예술’이라 느꼈다”고 덧붙였다.
선수들이 이야기하는 또 하나의 장점은 ‘짧은 이동거리’다. 메이저리그 구단 스카우트는 “미국의 경우 한 시즌을 치르다 보면 엄청난 이동거리를 소화해야 한다. 장시간 이동과 원정 생활이 주는 피로와 스트레스를 이겨내야 한다”며 “반면 KBO리그는 이동거리가 훨씬 짧아서, 미국에서 뛸 때보다 피로도가 적고 컨디션을 조절하기에 용이하다는 얘기를 한국 무대를 경험한 선수들에게 들었다”고 했다.
마이너리그에선 못 받는 스타 대접
KBO리그를 새로운 구종을 장착하거나 테스트할 기회로 삼는 선수도 많다. 지난해 LG 트윈스에서 활약한 디트릭 엔스는 LG 합류 당시 염경엽 감독으로부터 “체인지업 장착이 과제”라는 평가를 들었다. 결과적으로 LG에서 뛰는 동안에는 체인지업 완성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 미국야구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계약하고 빅리그 마운드를 밟은 뒤에는 체인지업을 잘 활용해서 재미를 봤다. 타자의 경우에는 변화구 대응력을 키우고 타석에서 인내심을 키우는 효과도 있다.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구단의 극진한 배려와 팬들의 응원을 받는 것도 큰 힘이 된다. 미국에서는 수많은 선수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한국에서는 팀의 에이스이자 중심타자로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과거 LG에서 활약한 타일러 윌슨은 팬그래프스 인터뷰에서 “서울은 멋진 도시다. 우리가 원하는 건 뭐든 구할 수 있다”며 “아름다운 아파트에 살고 필요한 모든 게 있다. 삼성역 지하 쇼핑몰에 가면 밖에 나갈 필요도 없다. 생활 환경이 훌륭하고 대중교통도 편리하고 깨끗하고 간단하다”고 한국 생활을 극찬했다.
무엇보다 KBO리그 팬들의 열정적인 응원은 외국인 선수들에게 특별한 경험이다. 미국에서 관중석 한편에서 간헐적으로 들리던 환호성이, 한국에서는 경기 내내 쏟아지는 응원가와 함성으로 바뀐다. 과거 두산에서 활약한 조시 린드블럼은 팬그래프스와 인터뷰에서 “KBO에서 처음 던진 경기에서 1회에 내 심장이 가슴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미국에서 불안정한 신분으로 언제 방출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살던 선수들이, 한국에서는 팀의 중심 선수로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 야구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이다. 은퇴를 준비하던 선수들이 KBO리그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다시 메이저리그 무대로 돌아가는 사례가 계속 늘어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