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문재인 정권이 여론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밀어붙인 일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대일 관계도 고집스러운 정권을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 사안 중 하나일 겁니다. 작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화의 문을 항상 열어두고 있다”고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긴 했지만 문 대통령은 ‘죽창가’로 상징되는 서슬퍼런 대일 관계를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는 일본과의 사이에 차가운 단절의 강이 흐르게 됐습니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양국 간 물리적 이동이 극도로 제한된 것도 이런 단절을 키웠을 겁니다.

문 정권이 끝나고 윤석열 정권이 시작되면서 한·일 양국 간에 다시 훈풍이 부는 것 아니냐는 기대가 일고 있습니다. 물론 위안부와 징용공 문제 등 그동안 복잡하게 꼬인 일들이 쉽게 풀리기는 힘든 것들이어서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도 강합니다. 하지만 분명 얼음장이 깨지는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부터 한·일 관계 조속 복원에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취임식 다음날 일본 의원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한·일 관계의 미래 지향적 협력을 제시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발전적으로 계승해서 양국 간에 우호 협력 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이번호 커버스토리에 실린 가와무라 다케오 일한친선협회 중앙회 회장과의 단독 인터뷰는 한국의 화해 제스처에 대한 일본의 화답 성격이 짙습니다. 10선 중의원 출신인 가와무라 회장은 일한의원연맹 간사장을 맡는 등 자민당 내의 대표적 ‘지한파’로 통합니다. 이번에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과 함께 취임식 사절단으로 온 그 역시 “윤 대통령은 한·일 관계를 개선하고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하겠다고 했다”면서 “한·일 관계 개선에 대한 강한 의욕을 느낄 수 있어 매우 좋았다”며 기대감을 보였습니다. 조속한 한·일 정상 회담을 기대한다는 가와무라 회장이 일본으로 돌아가 기시다 총리와 어떤 대화를 나눌지 사뭇 궁금합니다.

윤 대통령이나 가와무라 회장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꽉 막힌 한·일 관계의 해법을 얘기할 때마다 늘 등장하는 화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한·일 관계 미래의 초석을 놓는 이런 합의와 선언이 나왔다는 것이 새삼 놀랍습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아직도 24년 전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오는 퇴행적 현실이 서글픕니다.  

1998년 10월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위해 일본을 국빈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을 맞던 일본의 분위기는 사실 편하지가 않았습니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불호령이 아직 어른거리던 때였고 무엇보다 ‘김대중 납치사건’이라는 원죄가 일본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진심을 앞세워 일본을 무장해제시켰습니다. 김 대통령은 일본 의회 연설에서 오히려 “독재정권하에서 망명생활 할 때도 사형선고를 받고 옥에 갇혀 있을 때 지켜주고 도와준 일본 국민과 언론인, 정치인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그가 목포상고 시절 일본인 은사를 초청해 일본어로 인사하고 감사를 표하는 장면은 일본인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김대중 대통령과 당시 오부치 게이조 총리 사이에 11개 항의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 탄생한 겁니다. 한·일 양국이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24년 전의 정신으로 돌아가기를 진정 기대해 봅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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