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제작된 디오픈의 트로피인 ‘클라렛 저그’. 뒤로 보이는 건물이 세인트 앤드루스의 클럽하우스다.  photo R&A
1872년 제작된 디오픈의 트로피인 ‘클라렛 저그’. 뒤로 보이는 건물이 세인트 앤드루스의 클럽하우스다. photo R&A

스코틀랜드 골퍼들은 1400년대 초반부터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골프를 쳤다. 이후로 골프에 진심인 전 세계 수많은 골퍼가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세인트 앤드루스는 ‘골프의 고향’ ‘골프의 성지’로 불리며, 이곳을 방문하는 골퍼를 ‘골프의 순례자’라고 부른다.

바비 존스는 1930년 한 해에 디오픈, 브리티시 아마추어 오픈, US 오픈과 US 아마추어 오픈을 모두 우승하고 은퇴했다. 그는 “골퍼가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클라렛 저그(Claret Jug)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면, 골퍼로서 경력을 완성했다고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디오픈을 우승했지만, 올드코스 우승을 달성하지 못한 로리 맥길로이는 “올드코스에서 디오픈을 우승하지 못했다고 골퍼로서 완성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스포츠의 성배(Holy Grail)라는 것은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클라렛 저그는 1872년에 제작된 디오픈의 트로피다. 트로피 명칭이 클라렛 저그인 이유는 포도주를 담는 주전자 모양이기 때문이다. 영국 사람들은 보르도 레드 와인을 클라렛이라고 부른다. 클라렛 저그는 잔이 아니라 주전자지만, 선수들에게는 성배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올드코스에서 플레이하고 난 후 성배는 올드코스 대지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번 홀부터 18번 홀까지 코스를 찬찬히 둘러보자.

번(Burn·1번 홀)에서 어드레스 자세를 취하면 긴장과 흥분에 사로잡힌다. 플레이를 기다리는 골퍼와 캐디, 마을 주민과 관광객 수십 명이 나의 티샷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골프의 역사를 장식했던 골퍼, 당대의 모든 우수한 골퍼와 수많은 유명인사가 이곳에서 같은 자세로 어드레스를 취하고 있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들이 지금의 나와 정확히 같은 장소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어딘가에 남아 있던 그들의 흥분과 긴장이 전달됨을 느낀다.

세상의 어느 스포츠에 이러한 경험이 있을까? 모든 테니스 선수가 윔블던 센터코트에 서 본 것은 아니다. 최고의 테니스 선수 중 하나인 닉 키리오스는 2022년 윔블던 결승에서 처음으로 센터코트에서 플레이해 보았다. 최고의 축구 선수가 모두 웸블리 경기장에 서지는 못했다. 모두가 있었던 자리에서 그들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느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1번 홀 이름이 번인 이유는 페어웨이를 가로지르는 실개천이 스윌컨 번(Swilcan Burn)이기 때문이다. 실개천 폭은 운동신경이 좋은 성인이 뛰어넘을 수 있는 정도다.

15번 홀에 있는 롭스(Rob’s)라는 이름의 벙커. photo R&A
15번 홀에 있는 롭스(Rob’s)라는 이름의 벙커. photo R&A

이름을 가진 올드코스의 홀과 벙커 

다이크(Dyke·2번 홀)에 서면 흥분과 긴장감은 잦아들지만, 공략 지점이 잘 보이지 않아 난감하다. 비로소 링크스 코스에 온 느낌을 받는다. 이 홀이 다이크(돌담)로 불리는 이유는 17번 홀 옆에 돌담이 있기 때문이다. 17번 홀과 2번 홀은 페어웨이를 공유한다. 원래 올드코스는 11홀을 갔다가 같은 11홀을 돌아오는 22홀 구조였다. 여전히 많은 홀이 페어웨이를 공유하고, 18홀 중 14홀이 그린을 공유한다. 골프코스가 18홀로 구성되는 이유는 22홀이었던 올드코스가 짧은 홀 8개를 통합하여 4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카트게이트(Cartgate·3번 홀)에 서면 오른편에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페어웨이 벙커가 무섭다. 370야드 파4 홀에 벙커가 10개나 있다. 이 홀이 카트게이트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곳으로 카트 길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게이트는 스코틀랜드어로 길이라는 의미다.

진저비어(Ginger Beer·4번 홀)는 생강으로 만든 사이다로 영국인이 마시는 전통적 음료수다. 1850년대에 앤더슨이라는 소년이 이곳에서 가판대를 놓고 진저비어를 팔았기 때문에 붙여진 홀 이름이다.

홀오크로스(Hole O’Cross·5번 홀)의 O’는 of를 뜻한다. 우측에 있는 일곱 개의 벙커인 세븐 시스터스를 피하기 위해서 좌측 14번 홀 쪽으로 공을 넘겨서 그린을 공략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13번 홀과 그린을 공유하는 5번 홀 그린은 그린 앞에서 뒤까지의 거리가 99야드에 달한다. 90야드가 넘는 퍼팅을 해야 할 수도 있다.

헤더리(Heathery·6번 홀)에 서면 링크스 코스의 상징인 헤더(Heather)의 자주색 꽃과 고스(Gorse)의 노란색 꽃이 화려하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하이(7번 홀), 166야드로 짧은 쇼트(Short·8번 홀), 전반의 끝을 알리는 엔드(End·9번 홀)는 간결하고 직관적인 이름이다.

바비 존스(Bobby Jones·10번 홀)는 전설적 골퍼를 기리기 위한 홀이다. 바비 존스는 어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을 설립했고, 어거스타 코스를 설계했고, 마스터스 대회를 창립했다. 덕분에 그는 골프의 성배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11번 홀부터는 홀 이름이 반복된다. 7번 홀이 하이 아웃(High Out)이라면, 11번 홀은 하이 인(High In)이 되는 방식이다. 11번 홀 그린 왼쪽에는 힐(Hill·언덕)이라는 이름의 벙커가 있다. 바비 존스가 1921년 디오픈에서 벙커샷을 4번 실패한 후에 스코어 카드를 찢어버리고 경기를 포기한 곳이다. 바비 존스는 인생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순간으로 이 사건을 회상했다. 매너와 실력을 모두 갖춘 골퍼도 때로는 자제심을 잃는 것이 골프다. 힐은 모두를 겸손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올드코스에서 첫 번째 플레이할 때 필자의 공도 힐에 빠졌지만, 두 번 만에 성공적으로 탈출했다. 힐은 때로는 골퍼에게 자부심을 주기도 한다.

12번은 헤더리 인, 13번은 홀오크로스 인, 14번은 롱(Long), 15번은 카게이트 인이다. 13번 홀 페어웨이 중앙에는 코핀스(Coffins·관)로 불리는 벙커가 있다. 

홀 이름은 골퍼의 경험이 쌓이면서 하나둘씩 지어진다. 홀을 번호로 부르지 않고, 이름으로 부르면 골퍼가 디봇과 피치마크를 더 잘 정리한다고 한다. 올드코스처럼 벙커에 이름이 있을 경우에 골퍼는 벙커 정리를 더 잘한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골프에 국한되지 않는다. 빈 공터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을 경우에 행인이 쓰레기를 줍는 비율은 7%인데, 빈 공터에 이름을 부여할 경우에 쓰레기를 줍는 비율은 41%로 크게 증가한다고 한다. 의인화로 인해 보살핌이 증가한다.

코너 오브 다이크(Corner of Dyke ·16번 홀) 우측으로는 세인트 앤드루스 링크스 골프 아카데미와 연습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로드(Road·17번 홀)에 서면 세인트 앤드루스 도심으로 돌아온 사실을 깨닫는다. 신성한 골프가 막바지에 달했다는 의미다. 오른편으로 길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길 옆으로는 돌담이 있고, 돌담 오른편에는 올드코스 호텔이 자리 잡고 있다. 티샷의 타깃 방향은 호텔에 부속된 레스토랑이다. 볼을 띄우지 못하면 레스토랑 건물을 직접 때리게 되며, 공을 띄워 건물을 넘긴다고 해도 슬라이스가 나면 호텔 건물 벽 어딘가를 맞히게 된다. 건물에 유리창도 있고, 호텔 관내에 사람도 있어서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긴장과 흥분으로 1번 홀을 시작했다면, 17번 홀에서는 오로지 긴장이 남는다. 티샷을 잘 친 후에 느끼는 만족감은 더할 나위없이 좋다.

톰 모리스(Tom Morris·18번 홀)에 서면 가까이에 올드코스의 상징물인 스윌리칸 브리지가 보이고, 18번 홀 그린 뒤로 R&A 클럽하우스가 보인다. 골프의 성배에 발자취를 남긴 감격은 다리를 건너며 절정에 달한다. 2022년 150회 디오픈에서 타이거 우즈는 컷오프가 거의 확정된 상황에서 다리를 건널 때, 모자를 벗어 팬들에게 인사하며 눈물을 흘렸다.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태어나 자란 올드 톰 모리스는 초기 디오픈의 지배자로 디오픈을 4회 우승했다. 그의 아들 영 톰 모리스도 4회 우승했으며, 클라렛 저그에 처음으로 이름을 새겼다.

2022년 디오픈 대회 때 올드코스의 상징물인 스윌리칸 브리지를 건너는 타이거 우즈. photo R&A
2022년 디오픈 대회 때 올드코스의 상징물인 스윌리칸 브리지를 건너는 타이거 우즈. photo R&A

성지에는 수많은 골퍼의 발자취가 있다

올드코스에서 처음 플레이할 때는 경황이 없었다. 두 번째 플레이할 때는 여유가 조금 생겼고, 주변을 살펴볼 수 있었다. 로드(17번) 왼쪽 러프에서 공을 찾고 있는데, 다이크(2번) 러프에서 공을 찾고 있는 골퍼를 만났다. 인사를 걸어와서 간단한 인사말로 화답했다. 그는 디오픈과 마스터스를 우승한 샌디 레일이었다. 세 번째 라운드에서는 하이 아웃(7번)과 하이 인(11번)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콜린 몽고메리를 만났다. 네 번째 방문 때는 클럽하우스에서 닉 팔도를 만났다. 유명 인사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것이 올드코스의 장점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은 올드코스 플레이 장점 중 끝자락에 불과하다.

이곳에는 600년 넘게 쌓인 수많은 골퍼의 발자취가 있다. 600년간 골퍼는 같은 위치에서 같은 자세를 취했고, 같이 실망하고 같이 환호했다. 같은 벙커에서 고생했고, 욕설을 쏟아붓다가 스스로를 자책하는 모습도 다른 듯 같았다. 같이 러프에서 공을 잃어버렸고, 행운의 버디에 같이 웃었다. 같은 대지에 서로의 발자국을 남겼고, 같은 하늘에서 같은 숨을 내쉬었다. 수많은 사람이 같이 남긴 발자취가 이곳이 골프의 성지이자 성배인 이유다.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주를 따라 마신 잔이 아직도 남아 있고, 그 잔에 포도주를 따라 마실 기회가 있다면, 기독교인 누구나 그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골퍼라면 누구나 올드코스에 발자취를 남겨 놓고 싶을 것이다.

퍼블릭 코스인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는 인터넷을 통해 두 명 이상이 조를 이뤄 티타임을 신청할 수 있다. 티타임은 이틀 전에 추첨을 통해 결정된다. 당첨 확인 후에 한국에서 세인트 앤드루스로 오는 것은 빠듯하다. 세인트 앤드루스 링크스 코스에는 올드코스 외에도 6개의 링크스 코스가 있다. 올드코스에 발자취를 남겨야 한다면, 일요일에 기회가 있다. 골프가 없는 일요일에 올드코스는 모두에게 개방되는 공원이 되기 때문에 발자취를 남길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진다. 한국에서 장거리 비행으로 왔는데, 반드시 올드코스에서 골프를 쳐야 한다면,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3명이 조를 이뤄 당첨된 조에 남는 한 자리와 당첨되었지만 오지 못하는 자리가 스타터 하우스에 먼저 오는 사람에게 배정된다. 전날 밤 9시부터 노숙하며 기다리는 순례자가 있지만,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새벽 3시 정도에 와도 자리를 얻을 수 있다. 기다리면서 세계 각지에서 온 골프의 순례자와 나누는 대화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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