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청년 세대는 아마 건국 이후 부모 세대보다 경제적으로 낮은 수준을 경험하는 첫 세대일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불행한 것 같다.” 최근 만난 한 국회의원이 얘기했던 말이다. 이를 반박할 수 있는 표현이 있다. 바로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이다. 이는 한국 사회의 자화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문구였다. 일제 침략과 6·25전쟁 이후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던 한국은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고속압축성장을 이뤄냈다. 이 과정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거나 열악했던 환경에도 고시나 전문직을 통해 성공한 인물들을 일컬어 우리는 ‘개천에서 난 용’으로 불렀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일까. 물론 여전히 그런 사례도 있다. 다만 그 확률이 현저하게 줄었을 뿐이다. 사회가 고도화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될수록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문제는 자신이 태어난 환경과 무관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다리는 점차 사라진다는 점이다. “학벌이 뭐가 중요해”라지만 어느 때보다 재수를 포함한 N수생 비율이 높거나, “직업에 귀천이 없다”면서도 문과 고등학생은 로스쿨, 이과 고등학생은 의대에 몰리는 현상이 이를 반영한다. 이마저도 대학원을 갈 수 있는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꿈꾸는 노릇이다. 더 나아가 “우리만 사랑하면 됐지”라면서도 결혼 상대에게 수많은 조건을 따지거나, 지나가는 아기를 보며 “너무 귀엽다”라면서 자녀 계획은 차일피일 미룰 수밖에 없다. 2022년 상반기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재학생 65%는 가구당 월소득 1024만원이 넘는 고소득층에 속했다고 한다.
“고시(考試)로 집안 일으켜세워”... 그땐 그랬지
예나 지금이나 공부를 ‘잘’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진다. 특히 고도의 산업화 과정과 민주화바람속에서지나온그시절엔더욱그랬다.어느시골 마을에서 서울의 한 명문대에 입학이라도 한다면, ‘OOO씨 아들 OOO군, □□대 △△학과 합격’이라는 플래카드가 대문짝만 하게 붙기 마련이었다. ‘닭장’ 같은 아파트처럼 다닥다닥 붙어 사는 2025년에는 현수막을 걸 수도 없을뿐더러, 건다 하더라도 온라인 커뮤니티에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을 터이다.
자격 조건이 필요 없던 ‘고시(考試)’는 대학보다 한 차원 높은 출세였다. 가난한 시절 모두에게 주어진 가장 빠른 성공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고시 ‘3대장’이었던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부터 ‘교편(敎鞭)’을 잡을 수 있는 임용‘고시’로 불리는 임용시험 등은 출세의 상징이었다. 특히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등에서는 대학을 가지 않은 ‘고졸’ 출신 합격자가 나오며 진짜 개천에서 난 용도 있었다.
고시가 아니어도 충분했다. 명문대 입학만 하면 어느 정도 성공은 보장됐다. 극소수의 예외만 아니라면 평균 수준 이상의 기업에는 무난히 들어갔다. 서울 상위권 대학이 아니어도 4년제 대학 졸업장은 먹고살기에 충분했다. 1980년대 말 부산의 한 사립대를 졸업한 60대는 이렇게 말한다. “4학년 마지막 학기쯤 되면 부산 지역 기업들에서 학과나 교수 앞으로 추천서가 날아오곤 했다. 그때도 고시나 전문직은 당연히 어려웠지만, 당장의 취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던 시대였다.” 졸업과 함께 취업이 보장되는 이른바 ‘계약학과’들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대학 졸업 후 취업준비‘생’으로 진학하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던 것.
흔히들 고시의 시대는 지났다고 말한다. 실제로 고시에 대한 관심도 시들해졌다. ‘3대 고시’ 중 사법고시는 LEET(리트·법학적성시험)와 로스쿨로 대체되며 사라졌으며, 행정고시와 외무고시(외교관자격선발시험)의 인기도 과거보다 떨어졌다. 그런데 또 다른 고시들이 등장했다.
바로 ‘4세 고시’ 혹은 ‘7세 고시’다. 유명 영어유치원 입학을 위한 시험이 ‘4세 고시’로 불리고, 이보다 앞서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치르는 유명 영어학원 입학테스트인 ‘7세 고시’도 유행처럼 번졌었다. 마치 고시처럼 느껴지는 입시가 명문대·특목고·국제중을 넘어 초등학교나 영어유치원까지 내려간 상황이다.

“엄마가 학벌이 전부는 아니라는데”... 로스쿨·의대↑
“선생님, 저희 학교 문과는 체감상 70% 정도가 로스쿨을 준비하는 거 같아요.” 기자가 수년 전 대입 과외를 했던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생은 최근 이같이 말했다. 이미 전국의 수재들이 모였다고 하는 최상위권 인문계열 학생들은 로스쿨만을 바라보는 현실이다. “난 ‘6수’ 해서 의대 가면 훨씬 가치가 있다고 봐. 이과는 어쩔 수 없지.”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대기업 신입사원이 해 준 말이다. 그 역시 명문대 공과계열을 졸업하고 굴지의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자연계열 학생들의 목표는 하나같이 의대에 쏠려 있다. ‘문과는 로스쿨, 이과는 의대’라는 공식은 이미 공고하게 자리 잡혔다.
청소년에게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앞으로는 더 그럴 거야”라고 말하지만, 대부분은 말끝에 단서를 붙인다. “그래도 아직 꽤 많이 중요한 부분이긴 해”라고. 앞서 4세 고시나 7세 고시도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자녀의 수능을 한 달 남짓 앞둔 한 학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영어유치원이 기본이라며. 우리 애는 의대를 바라지는 않지만, 어릴 때부터 더 체계적으로 준비했으면 또 달랐을까 싶기도 해.”
‘2027학년도 대비 LEET: 정가 129만원 → 초특가 104만원.’ 최근 유명 인터넷강의 사이트에 올라온 리트 강의료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로스쿨을 들어가야 하고, 로스쿨에 입학하기 위해 리트를 응시해야 하며, 그 리트 공부를 위한 수강료가 100만원인 것이다. 리트 점수가 높아 로스쿨에 합격한다 해도, 이번엔 등록금이 문제다. 올해 기준 전국 25개 로스쿨의 평균 입학등록금은 833만2049원으로 나타났으며, 1년 학비는 1495만2946원이다. “돈을 퍼부어야 변호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게 아닌상황. 법전(法典)만 사서 달달 외워 사법고시를 준비할 수 있는 시대는 일찍이 지났다.
서울 모 대학 법학과에서 리트를 잠시 준비했던 졸업생은 이렇게 말한다. “지방 거점 국립대 로스쿨도 한 학기에 최소 600만원 정도 든다. 이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럽다. 또 4년제 대학을 반드시 졸업해야 한다는 조건도 있지 않나. 오히려 사법고시와 비교했을 때 문턱이 높아진 것은 당연하다고 느꼈다.”
물론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위한 국가장학금 등 금전적 지원도 존재한다. 모 지방 거점 국립대 로스쿨 재학생은 “입학시험에 모든 로스쿨 정원 외 기회균형 전형이 있다”면서 “입학 후에는 기회균형 전형의 경우 등록금이 면제되고, 학자금 대출과 생활비 지원, 교내 근로장학금 등도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취약계층에게 문턱이 높은 건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통상적으로 학비가 인문 계열보다 비교적 높은 의대도 로스쿨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미 연간 등록금만 1000만원을 넘어섰다. 개천에서 난 용은 매년 1000만원 이상을 부담하기 어렵다.
“가난의 대물림 뒤집기에는”... 개천도 메말라가고 있어
“개천에서 용? 내가 개천 출신인데, 거의 사라졌다고 느껴.” 서울 상위권 대학을 졸업하고 지난해 취업한 20대 직장인 조모씨는 자신을 ‘개천’ 출신이라고 말한다. 충남 태안군에서 자란 그는 “이미 10년 전인 고등학생 때부터 서울로 ‘원정 특강’을 들으러 가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면서 “학원이 필수가 됐지만, 그조차도 거의 없어 대부분의 학생이 비슷비슷한 학원에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수도권과 지방 간의 격차가 더는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 어려운 사회를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취업준비생인 류모(25)씨는 고위층 자녀 등이 보여준 불평등·불공정한 모습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는 인식을 없애는 데 일조했다고 말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기회를 사회지배층 자녀는 쉽게 획득해온 것을 보며 그렇게 느꼈다. 박탈감이 곧 ‘어차피 나는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더 나아가 개천 자체가 시냇물처럼 더 쪼그라들거나 메말라가는 것 아니냐는 씁쓸한 이야기도 나온다. 군 복무 후 복학을 앞둔 양모(22)씨는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면서 개천이 예전 같지 않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양씨는 “없던 사람들은 더 없어졌다”라며 “분명히 옛날보다 개천이 좋아진 것 같은데, 더 쪼그라들고 좁아진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완전히 계층 사다리가 무너졌나’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사람은 없다. 여전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세상의 이치는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류씨는 “주변에서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한 사례도 당연히 있지 않으냐”라며 “주어진 조건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잘 살리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부모가 가난하더라도, 이를 신화처럼 뒤집을 수 있다는 기대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앞서 주간조선과 만난 모두에게 “가난의 대물림을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하나같이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공통적인 이야기는 “그건 어렵다”였다.
그중에서 한 20대 비서관의 이야기가 귀에 꽂혔다. “예전에는 대단한 성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 않았나 싶은데, 지금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 같다. 사회 전체적인 수준이 너무 높아졌으니깐.” 저출생·비혼·비자녀의 시대. 개천에서 난 용들이 한국을 용처럼 성장시켰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은 개천에서 더는 용이 나오기 힘든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