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거 우리 사람 아니에요. 중국인이 한 거예요.”
지난 10월 21일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 다문화 거리에서 만난 캄보디아 출신 20대 남성은 ‘캄보디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범죄 소식을 들은 적 있느냐’는 질문을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는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했지만, 무언가를 해명하듯 내뱉은 이 한마디만큼은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경남 창원시에 거주하는 캄보디아 캄폿주 출신 이주노동자 A(40)씨도 최근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지난 8월 캄보디아에서 20대 한국인 대학생이 중국계 범죄조직의 고문 끝에 숨진 이후, 현지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납치와 감금 사건이 속속 드러나면서다.
한국 생활 12년 차인 A씨는 “우선 캄보디아에서 사망한 대학생의 유가족과 모든 한국 국민에게 위로의 뜻을 전한다”면서도 “다만 이번 사건으로 일부 한국인들이 우리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됐고, 이로 인해 캄보디아 출신 이주민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억류하거나 체포하는 일은 캄보디아뿐 아니라 태국과 미얀마, 베트남, 라오스 등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다”고 억울함을 내비쳤다.
어제오늘 일이 아닌 혐오
A씨의 말처럼, 최근 한국 사회 전반에 ‘반(反)캄보디아 정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대부분 중국계 조직이나 한국인 구성원임에도 사건의 장소가 단지 ‘캄보디아’라는 이유만으로 나라 전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번지는 모양새다. 이는 캄보디아 현지의 한국 교민은 물론, 한국에서 살아가는 캄보디아 이주민과 이주노동자들까지 위축시키고 있다.
캄보디아를 배경으로 한 강력사건이 연일 보도되면서, 소셜미디어(SNS) 게시물이나 기사 댓글에서도 “캄보디아는 애당초 위험한 나라 아니었나” “캄보디아인을 한국에서 전부 추방해야 한다” “국교를 끊는 게 답이다” 등 노골적인 혐오 발언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동남아 국가 출신의 이주노동자들에게 혐오와 차별은 이미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경기도 포천시에 거주하는 방글라데시 노동자 B(37)씨는 “‘XXX야’ 같은 욕설은 물론이고 ‘여기서 일하기 싫으면 딴 데 가라’는 말을 한국 사람들한테 자주 들었다”며 “출신 국가를 이유로 차별받는 말을 들을 때면 마음이 상한다”고 토로했다.
국내 이주민 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지만, 이들을 대하는 사회적 시선 역시 여전히 차갑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이민자체류실태 및 고용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5월 기준 국내에 체류 중인 외국인은 156만1000명으로 집계됐다. 이 중 지난 1년간 차별 대우를 경험했다고 답한 외국인은 17.4%, 귀화 허가자는 17.7%에 달했다.
차별 대우의 주요 원인도 주로 ‘출신 국가’로 나타났다. 이에 ‘반캄보디아 정서’는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혐오 정서를 기반으로 더욱 탄력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국내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 캄보디아 교민이 한국인으로부터 “캄보디아는 범죄도시 아니냐”는 말을 듣거나, 택시 기사에게 승차 거부를 당하는 등의 일을 겪었다고 알려졌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 연구에서도 서구 백인에 대해서는 선망을 느끼는 반면, 흑인이나 동남아 등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 출신에 대해서는 하대하는 심리가 강하게 나타났다”며 “우리 사회에는 한민족 중심의 인식이 자리하고 있어, 캄보디아가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이고, 한국인이 그곳에서 피해를 봤다는 이유로 ‘그 나라 사람들은 나쁘다’라는 인식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반(反)한 정서’도 스멀스멀
캄보디아 내부에서도 한국 사회 분위기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셈 속행 캄보디아 한국관광가이드협회장은 지난 10월 13일(현지시간) 현지 일간지 ‘프놈펜포스트’와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가 사기 범죄와 관광객 안전 문제를 혼동한 점이 유감스럽다”며 “피해자 대부분은 불법 취업을 목적으로 입국했다가 범죄를 당한 경우일 뿐인데, 이를 근거로 캄보디아 전체를 위험국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안타깝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10월 16일 외교부는 한국인 대학생이 숨진 채 발견된 캄폿주 보코산 지역을 비롯해 태국 접경 포이펫, 베트남 접경 바벳에 흑색경보(여행금지), 시아누크빌에는 적색경보(출국권고)를 발령한 바 있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캄보디아 내 ‘반(反)한 정서’도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건축업과 선교사를 하고 있는 정모(50)씨는 “한국 음식에 관심 있는 캄보디아 사람들이 식당을 많이 찾았는데, 요즘은 손님이 줄었다”며 “페이스북 등 캄보디아인들이 모여있는 SNS에도 반한 정서를 드러내는 글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현지 상황을 전했다. 그러면서 정씨는 “한국 내 캄보디아 근로자나 유학생들이 이런 차별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임을 구성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말했다. 정재환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사건이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만큼 대중이 그런 인식을 갖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라면서도 “우리 사회에서 캄보디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퍼질수록 캄보디아 사람들 사이에서도 반발 정서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캄보디아는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가 연 4000억원 이상 투입된 곳이기도 하다. 정 교수는 “캄보디아 정부가 우리나라 국민을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했다며 책임을 전가할 경우, 양국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며 “정부가 이를 압박 카드로 쓰기보다는 ODA 등 협력 채널을 통해 국제적인 범죄 문제를 함께 개선하려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이주민 차별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네팔 출신의 우다야 라이 이주노동자조합 위원장은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인이 기피하는 3D 업종에 필요한 인력이자, 한국 정부가 데려온 사람들”이라며 “정작 한국에서는 캄보디아 출신 이주노동자가 다치거나 숨지기도 하는데, 캄보디아에서 사건이 벌어졌다고 해서 이들을 낙인찍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혐오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라며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 정부가 이주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이주 정책을 전면적으로 점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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