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9일 북한 평양에서 회담에 앞서 대화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과 또럼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왼쪽). photo 뉴시스·AP
지난 10월 9일 북한 평양에서 회담에 앞서 대화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과 또럼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왼쪽). photo 뉴시스·AP

지난 10월 9~11일 진행된 베트남 공산당 총서기장 또럼의 평양 방문은 2007년 농득마인 서기장 이후 거의 20년 만에 성사된 최고위급 방북이다. 이번 방북은 베트남·북한 수교 75주년과 조선노동당 창건 80주년을 기념하는 명분으로 진행됐지만, 그 속내는 명확하다. 김정은은 중국·러시아 대표단을 대동하고 베트남 지도자를 초청함으로써, 자신을 고립된 독재자가 아닌 아시아 사회주의 연대의 중심축으로 부각시켰다. 이는 불과 몇 달 전 천안문광장에서 김정은이 시진핑·푸틴과 함께 단상에 올라섰던 장면을 평양에서 재현한 것으로, 다극질서 속 ‘북한의 귀환’을 상징한다.

문제는 이러한 외교적 무대 뒤편에서 베트남이 유엔 대북제재 네트워크의 사각지대를 조성한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지난 11월 1일자 디플로맷은 ‘북한이 어떻게 베트남을 유엔제재 회피에 이용하고 있나’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기사는 지난해 4월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유엔 대북제재 전문가패널(Panel of Experts·POE)이 해체된 이후, 국제제재의 감시체계가 사실상 붕괴되면서 베트남이 새로운 ‘회색지대’의 중심무대로 부상했음을 지적했다. 이런 사각지대의 방치는 한반도 안보뿐 아니라 동북아 전체 비확산 체계의 균열로 이어질 수 있는 매우 위중한 사안이다.

베트남의 외교는 이념적 진영 논리나 사회주의 형제국 간의 전통적 연대보다는, 실리와 자율성 확보를 우선시하는 ‘선택적 균형’ 전략으로 진화하고 있다. 베트남이 스스로 ‘대나무 외교’라 부르는 이 노선은 표면적으로는 유연성과 원칙의 조화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미·중·러·아세안 등 다극체제 속에서 자국의 독자적 행동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러한 외교는 미국·중국·러시아·한국·일본 같은 주요 강대국들과의 교역과 안보 협력을 다변화함으로써 어느 진영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전략적 자율성을 추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베트남은 동맹·비동맹, 자본주의·공산주의라는 경계선을 유연하게 넘나들며, 단기적 실리를 극대화하려는 현실주의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 요컨대 베트남 외교의 핵심에는 ‘목표는 확고하게, 수단은 극도로 유연하게’라는 양면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념적 단절에서 전략적 공생으로 

1950년대 베트남·북한은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공통된 이념 아래 긴밀한 혈맹관계를 구축했다. 북한은 베트남전쟁 당시 북베트남(월맹)을 지원하기 위해 전투기 조종사를 파견하고 군수물자를 제공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들어 베트남의 ‘도이머이(쇄신)’ 개혁과 대외 개방은 양국의 이념적 균열을 불러왔다. 베트남이 1989년 캄보디아에서 철군하고 1992년 한국과 수교하자, 북한은 이를 ‘배신’으로 간주하며 관계를 단절했다. 특히 캄보디아 분쟁에서 북한은 중국과 크메르루주를 지지해 베트남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1979년 중·월(中越)전쟁 당시에도 북한은 중국을 편들며 베트남과 적대 진영에 섰다. 이 시기 북한은 시아누크 전 캄보디아 국가원수를 평양에 머물게 하며 반(反)베트남 세력을 지원했다. 베트남은 이러한 북한의 태도를 ‘혁명 동지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였고, 1980년대 말부터 양국 간 불신이 깊어졌다. 1990년대에 들어 베트남은 경제 개발과 국제사회 편입에 집중하며 북한과의 관계를 거의 방치했다. 공식적으로 대사관은 유지됐지만 실질 교류는 거의 중단되었고, 양국 간 무역도 1996년 이후 사실상 끊겼다.

2000년대 들어 남북 정상회담과 미·북 대화 등 한반도 긴장 완화가 이뤄지자 베트남과 북한도 관계 복원을 모색했다. 2000년 8월 북한 백남순 외무상의 하노이 방문은 약 8년 만의 고위급 접촉으로, 양국 관계 복원의 신호탄이었다. 이듬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베트남을 방문했고, 2002년에는 쩐득르엉 대통령이 평양을 공식 방문했다. 이 회담에서 양국은 ‘전통적 친선 협조 관계’를 재확인하며 경제·기술 협력 강화에 합의했다. 2007년에는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 농득마인이 평양을 찾아 김정일과 회담했다.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미·북 정상회담은 베트남·북한 관계의 상징적 전환점이 되었다. 비록 미·북 협상은 ‘노딜’로 끝났지만, 김정은은 회담 직후 베트남을 공식 방문해 응우옌푸쫑 서기장 겸 국가주석 등과 회담했다. 이때 양국은 ‘전통적 동지적 친선’을 재확인하고 국방·보건·무역 등 분야의 협력 의지를 표명했다. 코로나19로 잠시 교류가 중단됐지만, 2024년 이후 외교·국방·보건 분야 협의가 재개되었다. 특히 지난 10월 또럼 총서기장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과 면담하고, 5개 분야 협약과 이중과세방지 협정에 서명했다. 북한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혁명적 우의’를 강조했고, 베트남은 이를 ‘대나무 외교’의 실용적 확장으로 포장했다. 베트남 입장에서는 미국·중국 사이에서 자율적 외교 공간을 확보하는 한편, 국제사회에서 중견국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였다. 북한은 베트남을 통해 중국·러시아에 편중된 외교를 다변화하고, 국제사회에서 일정 부분 합법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결국 2019년 이후 베트남·북한 관계는 이념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전략적 공생관계로 전환되었다. 이는 양국 모두에 정치적·외교적 실익을 안겨주는 현실적 선택이자 실용외교 사례로 평가된다.

지난해 12월 12일 미국 FBI는 14명의 북한 국적자를 기소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허위 신원을 이용해 미국 기업의 원격 IT직에 취업하고, 급여와 관련 자금을 북한의 무기 프로그램에 전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photo 뉴시스·AP
지난해 12월 12일 미국 FBI는 14명의 북한 국적자를 기소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허위 신원을 이용해 미국 기업의 원격 IT직에 취업하고, 급여와 관련 자금을 북한의 무기 프로그램에 전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photo 뉴시스·AP

북한의 제재 회피 행위 

북한의 제재 회피 행위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북한은 유엔 안보리 결의 2397호(2017년)로 해외 노동자 송출이 금지된 이후,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한 새로운 통로로 ‘사이버 인력 위장 전략’을 고안했다. 이는 IT 인력을 원격근무자 혹은 프리랜서로 위장취업시켜 선진국 기업으로부터 프로젝트 계약을 따내고, 북한 정권이 그 대가를 갈취하는 수법이다. 유엔 POE는 이런 사이버 활동을 통해 북한이 연간 6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 재무부 또한 북한이 소프트웨어 개발 등 IT 서비스를 통해 얻은 현금을 핵·미사일 프로그램 자금으로 전용해온 정황을 공식 확인하였다. 

이는 기존의 대규모 불법 거래 대신, 소규모 노드를 전 세계에 분산시켜 움직이는 전형적 ‘스몰 노드 전략’의 디지털 버전이다. 북한은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세인의 주목을 받기 쉬운 경로 대신, 특히 베트남같이 제재 이행이 느슨하고 행정절차가 복잡한 국가들을 통해 제재망을 우회하고 있다. 베트남은 역사적 유대와 지정학적 접근성, 그리고 불균등한 제재 집행 환경 때문에 북한 IT 인력의 위장취업에 가장 적합한 거점으로 급부상했다. 

일례로 지난 7월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베트남 호찌민시에서 활동하던 소백수무역회사(Korea Sobaeksu Trading Company)를 제재 목록에 올리며, 이들이 유령회사를 통해 IT 인력을 해외에 파견하고 수익을 암호화폐로 세탁해왔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위조 신원과 허위 서류로 해외에 IT 인력을 파견해 외화를 벌어들이고, 베트남을 포함한 제3국에서 회사를 운영하며 북한의 불법적 핵·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러한 행태는 단순한 불법 고용이 아니라, 베트남을 중심으로 형성된 분산형 금융 네트워크를 통해 핵·미사일 자금이 조달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베트남이 북한식 ‘스몰 노드 전략’의 주요 거점으로 부상한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종류의 국가안보 위협이다. 북한이 베트남을 핵·미사일 개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회색지대로 활용하는 점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베트남은 느슨한 자금세탁방지체계(AML), 어설픈 고객신원확인제도(KYC), 형식적인 행정절차 중심의 국가로서, 북한의 IT 인력 위장취업, 암호화폐 자금세탁, 선박 환적 같은 악질적·불법적 제재회피 행각이 들키지 않고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지속되기에 가장 용이한 환경을 제공한다.

 

북한 IT 인력 위장취업 실태 

북한의 IT 인력 위장취업은 물리적 국경과 이동의 제약을 뛰어넘는 원격·플랫폼 기반 고용을 활용하여, 제재의 감시망을 비껴가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주된 수법은 해외 법인 혹은 제3국 신분을 내세운 허위 이력·가명 프로필로 글로벌 구인·프리랜서 플랫폼에 접근하여, 위장취업으로 획득한 수익을 꾸준히 축적하는 것이다. 북한의 위장 IT 취업망은 정교한 신원 조작과 원격 근무 인프라를 결합한 구조로 운영된다. 이들은 위조된 여권·운전면허증·학위증명서 등 허위 서류를 사용해 신분을 세탁하고, 링크드인·업워크 같은 글로벌 구인 플랫폼에 여러 개의 가명 프로필을 만들어 합법적 개발자로 위장한다. 채용 과정에서 북한인들은 영상 면접이나 현장 확인 등 대면 요청을 극구 회피하며, 대신 현지 대리인(proxy)을 내세워 인터뷰를 대신하거나, VPN·원격 데스크톱·시간대 스푸핑(Time-zone spoofing) 등으로 접속 위치를 마치 현지에 있는 것처럼 속인다. 채용 후에는 회사 지급 장비를 원격 통제하고, 급여는 차명계좌와 OTC(장외거래) 중개 등을 거쳐 세탁한다. 결국 일반 기업의 백그라운드 체크나 급여·세무 검증만으로는 외형상 합법적 고용처럼 보이는 국가 주도형 사이버 노동망을 식별하기 어렵다는 것이 수사 당국의 결론이다.

미 법무부는 지난 6월 30일 북한 정권이 미국 기업의 원격 IT 일자리에 위장취업해 불법적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북한 IT 근로자 수익 네트워크’를 단속했다고 발표했다. 전국적 규모로 실시된 이 공조 작전은 16개 주에서 29개 ‘랩톱 팜’을 수색하고, 29개 금융계좌, 21개 허위 웹사이트, 약 200대의 컴퓨터 등을 압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북한 인력들은 도용된 신원과 위조 문서를 이용해 100여곳의 미국 기업에 고용되어 수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으며, 일부는 인공지능(AI) 기반 방산 기술 등 수출통제 자료와 가상화폐를 탈취했다. 미 수사당국은 중국·대만·UAE 등지의 공범들과 미국 내 협조자들을 기소·체포했으며, 이들의 활동이 북한의 무기 개발 자금줄로 직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베트남에서 동남아로 확산 

디플로맷은 지난 11월 1일자 기사에서 베트남이 북한의 단순한 중간 경유지를 넘어, 불법 활동의 ‘합법적 외피’를 제공하는 ‘외교·경제 허브’ 역할을 수행한다고 지적했다. 북한은 베트남의 제도적 회색지대와 아세안 회원국 간 규제 불균형을 활용하여, 사이버·금융·노동 등 다중 도메인에서 작동하는 제재 회피 네트워크를 체계화하고 있다. 특히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도 엉성한 암호화폐 규제와 인력 수요 급증으로 인해 북한 IT 노동자의 위장취업 거점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불법취업이나 자금세탁을 넘어, 북한이 국제사회와 비공식적 경제 연결망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핵심 수단이다. 일부 아세안 국가는 북한과의 외교관계나 무역협정 때문에 제재 집행에 소극적이며, 그 결과 북한의 스몰 노드 네트워크에 합법적 사업의 외피를 제공하고 있다. 결국 이는 아세안 지역 전체가 제재 회피의 취약지대로 전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베트남은 외형상 유엔 제재를 이행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북한의 제재 회피를 돕는 이중 플레이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 베트남은 사실상 ‘합법을 위장한 불법 활동의 실험장’이 되어가고 있다. 북한의 위장업체들이 호찌민시·하노이를 거점으로 하는 스몰 노드 네트워크를 통해 자금 세탁·암호화폐 변환·IT인력 위장취업을 복합적으로 수행하면서, 베트남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국제제재 레짐의 가장 취약한 고리로 전락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베트남의 실용외교가 ‘대나무의 유연함’이 아니라, 제재 시스템의 허점을 악용하는 ‘기회주의적 은폐 무대’로 변질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베트남을 중심으로 구축된 북한의 디지털 스몰 노드 네트워크는 이제 캄보디아·라오스·미얀마 같은 규제 취약국가로 복제되어, ‘동남아 제재 사각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비공식 금융시장, 카지노, 암호화폐 환전상 등 제도권 밖의 거래 인프라를 통해 북한 자금이 ‘합법적 외환 흐름’으로 위장할 수 있는 도우미 역할을 떠맡고 있다. 이런 네트워크는 경제범죄를 넘어 국제 비확산 체계와 동북아 안보 구조의 균열을 초래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제재 감시가 느슨한 지역에서 북한의 자금·기술·노동 흐름이 하나의 디지털 제재 회피 생태계로 작동하는 현상은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전략적 차원의 위협이다.

베트남은 우리의 주요 교역 파트너이자 협력국이지만, 동시에 북한의 제재 회피에 도우미 노릇을 자처하는 잠재적 안보 위협의 허브로 변모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베트남과 경제·외교 협력을 강화하되, 제재 이행·사이버 보안·금융투명성 분야에서는 ‘조건부 협력’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 특히 우리 정부는 베트남 내 북한 기업·인력의 활동에 대한 실시간 정보공유 체계를 구축하고, 한·아세안 협력의 프레임워크 내에 제재이행 워킹그룹을 신설하여 지역 차원의 감시 네트워크를 강화해야 한다. 베트남은 더 이상 ‘북한의 스몰 노드 전략의 실험실’로 남지 말아야 한다. 베트남은 ‘대나무 외교’의 허울 아래 자율성·독자성을 내세우지만, 이중 플레이의 그늘 아래에서 북한은 제재의 사각지대를 확장하는 중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다극질서 시대에서 등장한 가장 위험한 공생관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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