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 17일 서울 용산구의 한 빌라촌. 저녁 8시가 넘자 골목은 순식간에 ‘주차장’으로 변했다. 양쪽으로 빽빽하게 늘어선 승용차 사이로는 차량 한 대가 간신히 빠져나갈 폭만 남아 있었다. 주민들은 “차 좀 빼 달라”는 연락을 끝없이 주고받고, 골목 모퉁이마다 내걸린 ‘주차 금지’ 표지판은 사실상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불이라도 나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소방차가 진입할 공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답답한 풍경을 바꿀 실마리가 일본에 있다. 일본 주거·도시정책을 연구해 온 표명영 메이카이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일본에서 오피스텔에 해당하는 원룸이나 1~2인 가구용 주택에는 자동차 보유자가 거의 없다”며 “대부분 결혼 전이거나 가족 단위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애초에 자동차 수요 자체가 낮다”고 설명했다. 필요가 없으니 법으로 주차장을 의무화하지도 않고, 실제로 ‘주차장 없는 맨션(한국식 아파트)’이 도심 곳곳에 존재한다. 주차장이 없으면 건축비도 줄어들어 값도 싸다.
차가 꼭 필요한 사람은 외곽 지역이나 단독주택, 주차장이 넉넉한 단지를 선택한다. 반대로 “차 없이 살겠다”는 사람들은 역세권의 주차장 없는 주택을 선택한다. 표 교수는 “이러한 문화가 도심에서는 차를 줄이고 사람과 대중교통 중심의 도시를 만드는 효과를 낳고, 자동차 의존도가 높은 가구는 외곽·단독·지하주차장 있는 아파트로 이동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형성된다”고 말했다.
도쿄 지하철 옆 無주차장 맨션
도쿄 도심의 맨션들은 주차장을 최소화하는 대신 지하철 접근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지하철역에서 도보 5~10분 이내에 자리한 소형 맨션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고, 한국처럼 수천 가구가 모여 사는 대단지 아파트를 한꺼번에 올리는 방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주차장이 빠진 만큼 건축비 부담은 줄고, 동일한 면적 안에 더 많은 가구를 공급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반면 한국은 주차장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정부가 과거 도입한 ‘도시형 생활주택’은 이런 병목을 조금이나마 풀기 위한 조치였다. 가구당 주차 대수를 0.4대로 낮춰 같은 대지에 더 많은 소형 주택을 허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완화책은 부분적 조정에 그쳤고, 기존 빌라·연립·단독주택 지역에는 여전히 가구당 0.8~1대 기준이 벽처럼 남아 있다. 한국이 일본처럼 역세권에 주택을 촘촘히 공급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 ‘숫자를 강제하는’ 주차장 규제다. 의무 기준을 채우지 못하면 가구 수를 늘릴 수 없기 때문에 용적률과 건폐율이 남아 있어도 공급 확대가 구조적으로 가로막히는 것이다.
주택·도시 문제를 연구해 온 김윤재 네오용산연구소 대표(부동산학 박사)는 “주택 공급을 늘리는 방안으로 흔히 ‘용적률 상향’을 이야기하지만, 현행 법규상 용적률을 올리는 것은 매우 어렵다”며 “오히려 주차장 설치 의무 규정을 손보면 공급을 실질적으로 늘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같은 대지, 같은 건물 규모라도 현행 주차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면 10가구가 한계지만, 기준을 완화하면 15가구까지 가능해지고, 역세권처럼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은 지역에서는 주차 의무를 폐지할 경우 설계에 따라 가구 수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애초에 그런 철학으로 새로 짓는 아파트라면 입주자들은 ‘주차장이 없는 집’이라는 조건을 알고 선택하기 때문에 나중에 ‘왜 주차장이 없느냐’는 식의 반발도 훨씬 줄어든다”고 덧붙였다.
김 대표는 “이건 ‘차를 팔라’고 강제하는 제도가 아니라 철저히 선택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새로 짓는 주택에 대해 ‘이 단지는 주차장이 없습니다’라고 명확히 안내하면, 차가 꼭 필요한 사람은 처음부터 그 단지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로 차가 없거나 차를 가질 계획이 없는 1~2인 가구, 청년·신혼부부라면 주차장이 없더라도 역세권이라는 장점을 이유로 오히려 선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차장이 없으면 건축비도 크게 줄어드니 값싸게 이용할 수 있어 만족도도 높을 것이다.
주차장 규제 풀어 공급 늘려야
용적률을 더 올리지 않고 가구 수를 늘릴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은 사실상 주차장 규제뿐이다. 이것을 손대지 않은 채 ‘공급 확대’만 외치다 보니 서울 도심 재개발·재건축은 사업성이 맞지 않아 멈춰 서거나 포기하는 사례가 잇따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 벽을 과감히 허문다면 어떻게 될까. 해법의 핵심 키워드는 ‘역세권’이다. 김 대표는 “핵심은 입지별로 접근 방식을 달리하는 것”이라며 “지하철역 반경 200~300m 이내 역세권, 대중교통이 잘 발달한 도심·부도심, 자전거·렌트카·카셰어링 이용 환경이 갖춰진 지역의 빌라·연립·소규모 공동주택에 대해서는 가구당 주차장 규정을 과감히 없애거나 최소한 대폭 완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용적률을 건드리지 않고도 주차 기준만 조정하면 같은 건물 규모에서 가구 수를 크게 늘릴 수 있고, 도심 교통량 감소·혼잡 완화·탄소중립 등 다양한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다”며 “이는 물리적 개발이 아닌 제도 개선만으로 달성 가능한 변화”라고 강조했다.
주차장을 없애면 오히려 골목 한복판에 차를 세우는 한국식 ‘길바닥 주차’가 더 심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오히려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김 대표는 “지금 골목길이 막힌 이유는 가구당 주차장 1대씩은 갖추고 있음에도 결국 도로까지 점령해 버리기 때문”이라며 “도로 폭은 좁은데 지상·지하를 막론하고 주차공간을 ‘집 안’에서만 해결하려다 보니 구조적으로 한계가 생긴다. 소방차 진입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해법으로는 ‘소규모 사설 주차장’ 육성이 꼽힌다. 김 대표는 “역세권의 주차장 의무는 과감히 없애되, 역세권 주변에는 소규모 사설 주차장을 촘촘하게 공급해야 한다”며 “현재 한국은 공영주차장은 제법 있지만, 33㎡짜리 땅에 차량 두 대를 세울 수 있는 소형 사설 주차장은 거의 없다. 땅 주인이 땅이 생기면 자동으로 상가 건물을 짓는 모델만 배워 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상가 공실이 늘고 장사가 안되는 지역이 많은 만큼, 작은 주차장을 조성해 무인결제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재산세·종부세·주차 수입에 세제 혜택을 제공한다면, 상가를 억지로 지어 빚을 떠안는 것보다 주차장 사업이 훨씬 수익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 소유를 억제하는 일본 정책도 참고할 만하다. 일본에서는 차를 구입하려면 먼저 주차 공간을 증명해야 한다. 이른바 ‘차고지 증명제’로, 집에 주차장이 없으면 인근 민간·공영 주차장을 임대해야 하고, 계약서를 제출해야만 자동차 등록이 가능하다. 표명영 교수는 “일본에서는 차를 ‘사는 것’보다 먼저 주차장을 ‘빌리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며 “근처 민간·공영 주차장과 최소 한 달 이상 임대계약을 맺고, 계약서를 제출해야 차량 구입·등록 절차가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