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7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을 비판하는 안내문이 게시돼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해 6월 7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을 비판하는 안내문이 게시돼 있다. photo 뉴시스

최근 의정갈등 사태가 일단락됐다. 전공의와 의대생은 대국민 사과를 했고, 정부와 여당은 이를 계기로 ‘특례 조치’를 시행했다고 밝혔다. 정부와 의료계가 제도 논의의 장으로 돌아갔다고는 하지만, 이번 사태가 남긴 질문은 단순한 정책 충돌을 넘어선 것이었다. 바로 전문가 집단이 사회로부터 어떤 권한을 위임받았으며,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는 단지 의사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 사회 전반에서 전문가 집단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음을 드러내는 단면이다. 그 중심에는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권한과 책임의 불균형’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놓여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전문가 집단은 자율성과 전문성을 앞세워 집단 내부의 이익을 보호하고,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되는 경향이 짙어졌다.

이번 의정갈등은 그러한 왜곡된 구조가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정권에 대한 불신이 큰 상황에서도, 의대 정원 확대 정책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각종 언론 보도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이번 기회에 특권화된 의사 집단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는 단순히 정책 내용의 찬반을 넘어, 전문가 집단이 사회적 권위를 어떻게 행사하고 있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회의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의사 집단이 국민과의 신뢰 관계를 충분히 형성하지 못하고, 내부 논리에 갇힌 채 집단행동을 선택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전문성은 공공의 이익에 기여해야

의료계는 정부의 일방적 정책 추진에 반발하며 강경한 집단행동에 나섰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정당한 반대권의 행사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전문가로서의 설명 책임, 시민을 향한 설득의 노력, 공공성에 대한 고려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환자 진료 거부와 복귀 거부는 전문가 집단이 자율성을 무기로 삼아 사회적 책임을 유예하려는 태도로 해석되었고, 이는 곧 시민의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 시점에서 국민의 시선은 의학적 전문성의 내용 자체보다는, 전문가 집단의 태도와 사회적 책임감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의료계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법조계, 학계, 공학 및 금융 등 다양한 전문가 영역에서도 유사한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 법원은 판결권의 독립을 주장하지만, 내부의 위계질서와 관행은 여전히 강고하다. 학계는 학문의 자유를 내세우지만, 연구 생태계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산업과 금융 분야는 기술과 데이터를 독점하면서도 공공성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는 모두 자율성과 전문성이 사회적 책임과 결합되지 못한 채 사적 권위로 전환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전문가 집단이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을 유지하려면, 그 권한이 실제로 어떻게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전문가에게 주어진 자율성은 결코 자기 목적적인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로부터 위임받은 계약적 권한이며, 전문적 판단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제도적 수단이다. 

전문가가 신뢰를 잃는 순간, 문제는 특정 직군의 위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 전체가 제도적 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하고, 그 공백은 감정적 여론과 정치적 선동이 채우게 된다. 신뢰 없는 전문가 사회는 결국 시민의 선택지를 협소하게 만들고, 의사결정의 질을 저하시킨다. 그 피해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돌아오며, 결국 공동체 전체의 회복력을 약화시킨다. 따라서 전문가 집단의 권한과 자율성은 철저히 사회적 설명 가능성과 책임 이행으로 증명되어야 하며, 그 기반 위에서만 지속 가능하다.

전문가 집단은 자율성을 자주 주장한다. 의사의 진료권, 판사의 판결권, 교수의 학문 자유 등은 모두 자율성이라는 개념으로 보호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자율성은 공공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지, 전문가 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가 아니다. 자율성이 비판을 회피하고, 외부 개입을 차단하는 논리로 사용될 때, 사회는 그 자율성을 더 이상 정당한 권리로 보지 않는다. 자율성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정당성을 반복적으로 입증해야 하며, 이는 오로지 시민의 신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전문가 집단이 진정으로 자율성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 자율성이 어떻게 공익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투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반대의 목소리는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가 시민을 납득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조직적 위협이나 강압적 집단행동으로 표현될 때, 그것은 전문가의 자율성이 아니라 이익 집단의 권력 행사로 비칠 수밖에 없다. 설득 가능한 권위, 설명 가능한 자율성, 책임을 수반하는 전문성만이 사회적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다. 

 

자율규제책 필요

결국 전문가 집단이 사회적 책임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치화가 아닌 자율규제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최근 전문가들이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 이는 긍정적인 변화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참여가 권한 확대를 목표로 하는지, 책임 확대를 지향하는지에 따라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권력에 가까운 전문가가 아니라 책임에 가까운 전문가다.

대한민국은 지금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제도는 느슨해지고, 사회적 신뢰는 약화되었으며, 각 집단은 점점 파편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일수록 전문가 집단은 기존의 특권적 위치에 머무르기보다는 공동체의 미래를 함께 설계할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전문가란 단순히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 지식에 기반해 사회적 책임을 가장 먼저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도를 실질적으로 설계하고 개선하는 데 기여하는 존재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대안과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는 이제 전문가들에게 묻고 있다. 당신들은 공공을 위한 설계자인가, 아니면 자기 권한을 방어하는 관리자에 불과한가. 이 질문에 설득력 있게 답하지 못하는 순간, 사회는 더 이상 전문가를 호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언제나 신뢰가 아닌 선동이다. 이 위기의 시대에 전문가가 다시 신뢰를 얻고, 사회의 중심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책임의 언어로 자율성을 설명하고, 공공의 윤리로 권한을 설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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